[최광숙 칼럼] 국정 지지율에 따라 요동치는 국가 정책
최광숙 기자
수정 2026-10-28 04:10
입력 2026-10-28 00:48
찬반 갈린 노란봉투법·사법3법
여야 숙의조차 패싱하더니
지지율하락에 원전 공론화 등장
오락가락 정책 유턴, 미래 없어
주요 현안을 놓고 공동체의 이익이 무엇인지 시민들이 논의하는 숙의민주주의 기제인 공론화는 정책 결정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본래 취지와 달리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문재인 정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가 대표적이다. 매몰 비용이 수조 원이나 되는 신고리 원전 공사를 중단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핵심 지지층의 ‘탈원전’ 압력을 무시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공론화위원회에 책임을 떠넘기는 꼼수로 활용됐다. 결국 문 정부는 공론화위의 권고에 따라 신고리 원전 공사를 재개할 수 있어 지지층의 비판을 모면할 수 있었다. 여기에 신규 원전 백지화 및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등 탈원전 정책은 더 강화하는 명분까지 확보해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이달 초 출범한 ‘원전 공론화위’도 당초의 취지에서 벗어난 듯하다. 신규 원전 건설에 대한 국민 찬성 여론이 80%를 넘는데, 왜 공론화가 필요한지 납득하기 어렵다. 앞서 정부는 지난 6월 기존 재생에너지 중심 기조에서 벗어나 원전을 적극 활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런데 국가 에너지 정책의 기조가 4개월 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AI) 시대에 데이터센터 등에 필요한 폭발적 전력 수요는 불안정한 재생에너지 확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현실적 방안은 원전밖에 없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를 중점 사업으로 추진 중인 정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정부가 공론화를 내세워 핵심 전력 공급 방안을 놓고 액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는 형국이다.
지금 탈원전했던 세계 각국이 다시 원전으로 귀환하면서 원전 속도전을 벌이고 있다.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한시가 급한데 원전 시계를 멈춘 배경을 굳이 찾자면 30%대로 내려앉은 국정 수행 지지율 하락 아닐까. 공론화위 측은 “국정 발목 잡기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뜬금없는 공론화 행보는 탈원전을 외치는 지지층 이탈 저지를 위한 정책 회귀이거나 시간 끌기를 위한 정치적 저의라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원래 공론화 과정을 제대로 거치면 정책 수용성과 안정성이 높아지고, 정책의 생명력이 길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 원전 공론화는 국정 지지율에 따라 정책 방향이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게 사실이다.
호남 반도체 특구 내 노동규제 완화 법안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기술 개발 특성상 전문직과 연구개발 인력은 주 52시간 근무 적용을 받지 않도록 해 달라는 산업계의 요청에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인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사회적 대화’로 해결하자고 제동을 걸었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이 “새로운 제도를 만들 필요까지 있나”라며 노동계 손을 들어 줬다. 지지율 하방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한 ‘노동계 달래기’가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재명 정부는 공론화를 좋아한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정반대다. 정권 초기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할 때 정작 공론화가 절실한 쟁점법안 등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일쑤였다.
노사 간 찬반이 첨예하게 엇갈린 노란봉투법을 비롯, 기업인에게 과도한 엄벌을 가하는 중대재해처벌법, 위헌과 법치 훼손 논란을 빚은 ‘사법 3법’ 등은 국회에서 여야의 최소한의 심의마저 패싱했다. 하나같이 사회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국민 의견이 크게 갈리는 사안인데도 공론화나 숙의도 없이 국회에서 단독 처리했다.
선진국에서는 형사사법 체계를 전환할 때 수년에 걸쳐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사법부·학계·전문가 집단의 치열한 검증 등을 거친다. 수사기관 개편 시 향후 범죄율의 추이에 대한 실증적 연구까지 한다. 그게 진짜 공론화다.
일반 시민들에게 3개월 동안 전문성이 요구되는 사안에 대해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은 ‘얼치기’ 공론화이고, 때론 의도를 숨긴 정치적 행위일 뿐이다. 굳이 공론화를 한다면 그 시점도 원전 방침을 세우기 전에 했어야 했다.
역대 정권에서 국가의 앞날을 좌우하는 주요 정책이 정치와 이념에 휘둘리는 것을 많이 봤다. 하지만 원전 같은 중장기 에너지 정책이 한 정권 내에서 지지율 등락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건 유례없는 일이다. 이래서야 어떻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입에 담을 수 있겠나.
최광숙 대기자
2026-10-28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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