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유럽이 어쩌다

홍희경 기자
수정 2026-10-28 04:10
입력 2026-10-28 00:47
유로화 도입 직전, 생애 처음 밟은 유럽은 스코틀랜드 시골이었다. 그 작은 마을에서 B&B를 접했다. ‘숙박과 조식’이라는 담백한 이름부터 멋졌고, 민박이 이렇게 세련될 수 있나 놀랐다. 그때는 유럽의 모든 것이 경외의 대상이었다. 노천카페의 자유, 웃으며 건네는 “쏘리”, 도시를 잇는 철도까지. 유럽은 언젠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기준 같았다.
지금 유럽은 체면을 구겼다. 에어컨 없이 폭염을 견딘다는 뉴스나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없다는 불평 섞인 릴스가 넘친다. 갈 때마다 위험해지는 거리, 제시간에 오지 않는 기차도 ‘유럽의 느긋함’으로 퉁치던 너그러움을 프랑스 폭동 이후 더는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
눈에 씐 콩깍지가 벗겨지니 쇠락의 이유가 끝도 없이 보인다. 빅테크 없는 경제, 늙어가는 인구, 치솟은 에너지값, 양극화된 정치, 유로화의 실패. 심지어 그 좋던 B&B를 산업화한 에어비앤비가 주요 도시 집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놨다고 한다.
유럽을 만든 가치들이 유럽을 할퀴는 모습에, 21세기판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는 심정이다. 야속하게도 반짝이던 시절은 참 짧다.
홍희경 논설위원
2026-10-28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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