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타민 B2가 구리를 왕좌에서 끌어내렸다…70년 화학 교과서 뒤집혀

유용하 기자
수정 2026-09-06 12:01
입력 2026-09-06 12:01
세줄 요약
- 비타민 B2 유래 분자로 금속 안정도 순서 뒤집기
- 수소결합 조절로 구리의 1위 안정성 약화 확인
- 폐배터리 회수·촉매·인공효소 활용 가능성 제시
카이스트 제공
물에 금속 이온과 여러 분자를 함께 넣으면 분자들이 금속 이온을 빙 둘러싸며 달라붙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덩어리를 ‘금속 착물’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금속은 아주 단단하게 붙고 어떤 금속은 헐겁게 결합한다.
1953년 영국의 화학자 해리 어빙과 로버트 윌리엄스가 ‘전이금속 착물의 안정도’라는 논문을 발표한 이후 현재 대학 무기화학 전공 교과서에는 ‘어빙-윌리엄스 계열’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덕분에 화학자들에게 ‘망간<철<코발트<니켈<구리>아연’이라는 금속 착물 결합 안정도는 익숙해져 있다. 구리가 가장 단단하게 결합한다는 이 순서는 금속마다 전자가 놓인 방식인 전자 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순서를 바꾸기 위해서는 금속을 직접 붙잡는 분자인 리간드를 새로 설계하거나 붙는 방식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스트 화학과 연구팀은 금속이 직접 닿는 부분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작용하는 약한 결합력인 수소결합에 주목해 비타민 B2의 핵심 골격인 플라빈을 변형한 분자로 ‘반 어빙-윌리엄스 계열’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6일 밝혔다. 이 연구 결과는 화학 분야 국제 학술지 ‘미국화학회지’ 9월 3일 자에 실렸다.
수소결합은 분자와 분자 사이를 살짝 붙잡아 주는 약한 힘으로 주변의 구조를 일정한 형태로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연구팀은 비타민 B2의 플라빈을 변형해 망간, 철, 코발트, 니켈, 구리, 아연 여섯 금속을 하나씩 넣어 금속을 둘러싼 모양이 똑같도록 했다. 똑같은 틀에 금속만 바꿔 끼운 것처럼 되기 때문에 순수하게 금속 차이만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금속 착물 결합 안정도 1위였던 구리가 뒤로 밀려난 것이 확인됐다. 구리는 주변 결합 구조를 살짝 비틀어 편한 모양을 만들면서 더 안정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사람이 의자에 오래 앉아있을 때 몸을 조금씩 움직이며 편한 자세를 찾는 것처럼 구리도 자세 바꾸기를 통해 결합 안정도 1등이라는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연구팀이 만든 분자는 주변 수소결합이 구리를 단단히 붙잡아 안정적 구조로 변하는 것을 방해해 구리의 결합이 예상보다 약하게 만든 것이다. 금속과 직접 맞닿은 부분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주변 환경만 조절해서 교과서에서 알려진 금속의 안정성 순서를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교과서와 정반대인 ‘반 어빙-윌리엄스 경향’을 보이는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연구팀은 분자의 실제 구조를 관찰하고 결합 세기를 측정한 데 이어 금속 교환 실험과 컴퓨터 계산까지 수행해 원인이 수소결합이라는 것을 확실히 했다.
원리를 증명한 기초 연구이지만 추가 연구를 통해 산업적으로도 다양한 활용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폐배터리나 산업 폐기물에는 여러 금속이 섞여 있는데 원하는 금속은 잘 붙고 나머지는 덜 붙게 만든다면 필요한 금속만 골라서 회수할 수 있게 된다. 또 화학 반응을 돕는 촉매를 설계할 때나 인체 단백질과 효소가 철, 구리, 아연 가운데 필요한 것만 골라 쓰는 원리를 흉내 낸 인공 효소를 만들 때도 활용 가능하다.
연구를 이끈 백윤정 교수는 “이번 연구는 금속 고유의 특성으로 여겨졌던 결합 안정성 순서를 주변 환경 변화로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밝혔다.
카이스트 제공
유용하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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