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美하버드 수목원서 싹튼 ‘K-식물’의 위로…100여년 된 韓 은행나무가 3대를 잇다

김성은 기자
수정 2026-03-16 15:09
입력 2026-03-16 15:09
윌리엄 프리드먼 아놀드 수목원장 “식물은 인류 연결하는 궁극의 외교 대사”
한국전쟁 겪은 할머니, 손자가 고른 ‘한국산 은행나무’ 아래 유년 추억 회상
“미국 땅에서 자란 한국산 은행나무가 한국의 할머니와 이곳의 한국계 손주를 문화적 유산으로 이어주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식물 대사’(Plant Ambassador)의 역할을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보스턴에 위치한 하버드 대학교 아놀드 수목원에는 120년 전 한국 땅에서 건너간 특별한 ‘식물 대사’들이 뿌리 내리고 있다. 윌리엄 네드 프리드먼 하버드대 아놀드 수목원장은 15일 본지에 보낸 하버드대 산하 식물 전문 학술지 ‘아놀디아’ 최신 기고문을 통해 한국의 식물이 어떻게 세대 간의 단절을 메우고 국경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잇고 있는지에 대한 감동적인 실화를 전해왔다.
1904년 한국 씨앗…하버드 한국계 손주와 할머니 연결수목원의 기록에 따르면 1902년 일본 식물학자 우치야마 도미지로가 한국 탐사를 통해 수집한 32종의 씨앗이 1904년 12월 아놀드 수목원에 접수됐다. 120여년이 흐른 지금 그 씨앗에서 유래한 7종 14개체의 식물은 여전히 수목원을 지키고 있다. 그중에는 아놀드 수목원으로 들어가는 역사적 관문인 ‘월터 스트리트 게이트’를 수문장처럼 지키는 두 그루의 ‘한국산 은행나무’도 포함돼 있다.
프리드먼 원장은 “중국이 원산지인 은행나무는 6세기경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간 뒤 한국의 문화와 원예 속에 깊이 뿌리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 나무는 최근 프리드먼 원장이 하버드대 1학년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나무 세미나’에서 특별한 사연을 만들어냈다. 이 수업은 아놀드 수목원의 1만 6000여종 식물 가운데 하나를 골라 매주 관찰한 뒤 직접 찍은 사진이나 그림에 관찰 기록을 덧붙여 제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수업에 참여한 한국계 미국인 학생은 관찰 대상으로 월터 스트리트 게이트 앞에 서 있는 이 한국산 은행나무를 선택했다. 학기 중 ‘부모님의 날’에 수목원을 찾은 학생의 할머니는 손자가 가리킨 나무 앞에 발길을 멈췄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서 자란 할머니는 그 나무 아래서 가을마다 황금빛 은행잎을 주워 모으던 소녀 시절의 추억을 손자에게 조용히 들려주었다.
수목원의 은행나무는 한국계 손자에게는 ‘학업의 대상’이었지만, 한국에서 온 할머니에게는 ‘고향의 추억’이었다. 식물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며 여러 세대에 걸쳐 기억과 정체성을 잇는 ‘살아 있는 외교 대사’ 역할을 한 셈이다.
프리드먼 원장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나무 한 그루가 미국에서 자란 손자와 한국의 할머니를 이어주고, 두 사람을 한국의 문화적 유산으로 묶어줬다”며 “이것이야말로 ‘식물 대사’의 역할을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강조했다.
용문사 천년 은행나무…프리드먼 원장의 한국 식물 예찬프리드먼 원장의 한국 식물에 대한 애정은 기고문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는 지난해 12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913년 창건)에서 마주한 1000년 된 암은행나무와의 만남을 “놀라운 경험”으로 회상했다. 수목원이 보유한 은행나무 씨앗들 역시 이러한 한국 사찰의 고목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설명했다.
또한 그는 한국 자생종인 노각나무와 중국 원산이지만 서울 창덕궁 후원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백송의 독특한 나무껍질을 언급하며, 이런 식물들이 자신을 먼 나라로 이끌고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해 배우게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나무들은 반대로 자국을 알리는 식물 대사 역할을 하며, 세계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나라의 자연과 문화에 관심을 갖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국가주의 넘는 ‘식물 연대’…“식물은 진정한 ‘외교 대사’“프리드먼 원장은 이러한 ‘식물 외교’가 이주민을 고향과 이어주는 정서적 차원을 넘어, 더 넓은 의미로 확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식물을 특정 국가의 소유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전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생물 다양성의 핵심 자산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특히 그는 “국가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식물은 각 나라의 고립된 관념을 깨는 ‘강력한 반대 서사’가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식물은 이미 국경을 넘어 전 지구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식물을 깊이 들여다보다 보면 우리 모두가 하나로 이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의미다.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아놀드 수목원은 한국의 국립수목원, 성균관대, 목포대 등과 손잡고 지난해 가을에도 한국 식물 자원 수집을 위한 공동 탐사를 진행했다.
프리드먼 원장은 “현장에서 현지 전문가들과 음식을 나누고 문화를 함께 나누는 모든 여정은 국경을 넘어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며 “그 여정은 식물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헌신인 동시에, 서로의 공통점을 확인하고 식물적·문화적 차이를 함께 기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 식물이야말로 진정한 궁극의 ‘외교 대사’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지난달에는 ‘2025년 가을 한국 식물 탐사’에서 수집한 씨앗 꾸러미가 보스턴에 도착했다. 프리드먼 원장은 “이 씨앗들이 앞으로 수 세기 동안 아놀드 수목원에서 한국의 생물 다양성과 문화적 유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될 것”이라며 글을 맺었다.
김성은 기자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Q.
기사를 다 읽으셨나요? AI 퀴즈로 핵심 점검!
하버드 아놀드 수목원에 한국 씨앗이 접수된 연도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