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대] 글로벌 코리안의 정체성/박현정 크레디트 스위스 기업커뮤니케이션 이사
수정 2009-09-28 12:52
입력 2009-09-28 12:00
우리는 글로벌시대에 필요한 소양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희석시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우리말보다 영어를 잘하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거나, 우리나라를 제대로 아는 것보다 국제적 안목이 더 필요하다고 느끼며, 유럽여행에선 잘 보존된 과거의 아름다움에 경탄을 보내면서도 우리는 강박적으로 서울에 존재하는 모든 과거의 흔적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식으로 말이다.
요즘 글로벌 기업에서는 글로벌 감각으로 무장한 비서구권 출신의 고급인력들을 예전보다 훨씬 많이 볼 수 있다. 글로벌 기업의 생태계도 시대에 걸맞게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을 보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나 문제 해결 능력처럼 글로벌 인재들의 공통분모는 여전하지만 문화적 정체성은 예전보다 다양해지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강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질 때 이들은 오히려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는 편이다. 모국어 억양이 묻어나는 좋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 자기 나라에 대한 문제의식과 자부심이 조화를 이룬 사람, 문화적 뿌리가 견고하면서도 타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은 사람처럼 말이다. 나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의 역사, 문학, 문화를 더 열심히 공부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을 많이 느낀다. 돌처럼 단단한 나의 정체성이야말로 결국 글로벌 무대에서 내가 내밀 수 있는 경쟁력의 밑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의 말과 공기와 문화적 코드를 바탕으로 키워진다.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인간에게 운명적으로, 하지만 공평하게 주어지는 생의 기초를 이루는 자양분이다. 정체성이란 결코 국제적 감각이나 다문화적 소양과 대치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를 풍성하게 키우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초체력과 같은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어딘가에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기를 열망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모국을 떠나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을 지구 위의 빈 공간을 걷는 사람이라고도 표현했다. 한국의 젊은 세대는 유치원에서부터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모국어보다는 영어의 우월적 효용성을 주입받으며, 조기유학을 통해 일찍부터 ‘지구 위의 빈 공간을 걷는’ 정신적 이방인이 된다. 건강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꾸기에 쉽지 않은 환경이 아닐 수 없다. 20~30대 자살률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마음 무거운 소식이나 ‘코리아디스카운트’에 대한 문제도 결국 이 모든 우리네 풍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박현정 크레디트 스위스 기업커뮤니케이션 이사
2009-09-28 3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