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된 詩語로 죽음을 통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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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 기자
수정 2008-08-15 00:00
입력 2008-08-15 00:00

옛 사람들의 눈물

옛 선비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슬픔을 좀체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자식을 잃어도, 아내를 잃어도, 지음(知音)을 잃어도 그 슬픔을 애써 삭이며 마음 속으로만 울어야 하는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슴속에 똬리를 튼 애통함을 어찌할까. 마음의 고질이 돼 몸만 갉아먹을 텐데…. 해서 옛 선비들은 죽은 자를 위한 산 자의 슬픔의 노래인 ‘만시(輓詩)’를 짓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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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만시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풀어낸 ‘옛 사람들의 눈물’(전송열 지음, 글항아리 펴냄)이 나왔다. 한시를 전공한 저자가 조선시대 문집에 실린 만시 35편을 가려 뽑아 그 역사적 유래와 미학적 특징을 분석, 옛 사람들의 슬픔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엿보게 해주는 책이다.

자신 죽음 읊은 자만시 등 輓詩 35편

저자에 따르면 만시는 자신의 죽음을 기리는 자만시(自輓詩)를 비롯해 자식을 잃은 참척(慘慽)의 아픔을 노래한 곡자시(哭子詩), 먼저 간 아내를 위해 지은 도망시(悼亡詩), 벗을 보낸 아픔을 삭이며 쓴 도붕시(悼朋詩)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자만시. 죽음을 예상하고 자신이 썼다는 점에서, 죽은 뒤 누군가가 써주어야 하는 일반적인 만시와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압축해 표현한 만큼 그 사람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조선 중기 대문장가 이식의 자만시 등 3편이 실렸다.“살아온 세월이 예순네 해나 되었어도/장부의 한평생 쉴 틈이 없이 고달팠네/문장의 헛된 명성 끝내 화만 초래했고/(중략)/이제 저 세상 돌아가면 모든 생각 끊어지겠지만/푸른 산은 변함없고 물은 동으로 흐르리라” 고위 관료인 대제학을 지낸 이식이 죽기 20일 전에 삶의 역정을 고백한 이 시는 인생이 그저 한번 왔다가 가버리는 나그네의 길이라는 점을 새롭게 일깨워 준다.

자식을 앞세우는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 있으랴. 오죽하면 ‘상명지척’(傷明之戚·공자의 제자 자하가 자식을 잃고 너무 슬퍼한 나머지 눈이 멀어 버렸다는 고사에서 유래)이라고 했을까. 조선 중기 여류시인 허난설헌이 남매를 차례로 잃고 지은 참척의 만시 등 5편이 수록돼 있다.“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다가/올해엔 또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중략)/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랄까/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며/피눈물 흘리며 슬픈 울음소리를 삼키노라” 아이 하나만 잃는 것도 견디기 힘든 고통일 텐데, 그것도 남매를 한꺼번에 먼저 보낸 애통함은 도저히 말로써 표현할 길이 없는 아픔이 녹아들어 있다.

추사 김정희 아내 잃은 슬픔 노래

인생의 고락을 함께한 아내를 잃은 슬픔 또한 어찌 깊지 않겠는가. 추사 김정희가 유배중 아내의 부음을 듣고 쓴 시 등 아내를 기리는 11편이 실렸다.“뉘라서 월모에게 하소연하여/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천 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유배 간 남편을 대신해 병든 몸으로 집안 대소사를 감당해야 했던 아내의 죽음을 천리 밖 유배지에서 들을 수밖에 없던 추사의 절절한 슬픔을 오롯이 담아냈다.

선비들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 고찰

둘도 없는 벗을 잃은 통절한 슬픔을 드러낸 만시도 있다. 조선 중기 문장가 이안눌이 40년 지기 권필의 죽음을 애도하며 썼다.“(중략)/내가 오래 살았음이 한스러운 것이 아니라/내게 눈이 있다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네/다시는 이 사람 보지 못하리니/이 험한 길에 부질없는 눈물만 흐르네”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인 표현을 써 통절함을 강조한 이 시는 벗의 죽음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저자는 “만시는 자신의 슬픔을 설명하지 않는 대신 오히려 깊이 농축된 한없는 슬픔을 느껴보라고 한다.”면서 “제문이나 묘지문 같은 산문이 아닌 만시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밝혔다. 말초적 감정에만 매달리고 있는 요즘, 옛 선비들이 슬픔을 시를 통해 승화시키는 절제의 미학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1만 48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2008-08-15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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