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간판과 실력/함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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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7-07-21 00:00
입력 2007-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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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혜리 논설위원
함혜리 논설위원
‘번쩍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니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외모에 현혹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여기서 외모란 비단 얼굴 생김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출신, 학벌, 배경, 지위 등 사람의 겉 모습을 이루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간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고, 인격이 훌륭해도 간판이 따라주지 않으면 주목받거나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간판 만능주의다.

간판의 대표적인 것이 학벌이다. 사람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도 우리는 지나치게 학벌을 중시한다. 어느 교수는 우리 사회의 학력주의에 대해 검증을 거치지 않고도 단번에 한 사람에 대해 평가를 내리려는 극단적 효율주의가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사람들은 간판을 화려하게 꾸미려고 기를 쓴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명문대 졸업장을 따야 한다. 기회만 닿으면 외국으로 유학을 간다. 좀더 급한 사람들은 자녀들을 조기 유학 보낸다. 조기유학을 보내려니 가족이 헤어져야 한다. 기러기 아빠가 양산되고, 멀리 떨어져 살다가 급기야 이혼을 하는 부부도 생겨난다. 이혼 가정의 아이는 사춘기를 견디기 힘들어하며 방황하다 결국 문제아가 된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불행의 악순환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간판 만능주의의 가장 큰 폐해는 가짜를 양산하고, 이 사회에 불신의 유전자를 퍼뜨린다는 것이다. 가짜 예일대 박사학위 사건의 주인공 신정아씨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났더라도 고졸 학력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았더라면 동국대 교수나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신씨가 석·박사 학위를 땄다고 당돌하게 거짓말을 한 것은 그런 풍토를 일찌감치 깨우쳤기 때문이다. 로비력과 재벌가 사모님들의 예술적 허영심은 이런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에 적절한 환경을 제공했지만 실력만으로 사람을 평가해 주는 사회였다면 신씨가 그런 생각을 했을 리 만무하다. 받지도 않은 영국 학·석사학위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난 KBS-FM ‘굿모닝팝스’의 강사 이지영씨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학력을 위조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면서 진짜 자기 실력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들도 의심의 대상이 되는 사태가 우려되고 있다.

외국에서,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간판에 이처럼 집착하지 않는다. 실력이 검증되면 학력이 어떻든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버진 애틀랜틱을 비롯해 수많은 기업의 CEO인 리처드 브랜슨은 중학교 중퇴의 학력이다. 난독증과 학교 혐오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곱살때부터 크리스마스 트리를 키워 파는 사업을 구상할 정도로 창의성과 모험심, 도전 정신이 뛰어났다.40세 이전에 이미 억만장자가 된 그는 2000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리처드 브랜슨은 많은 청년 기업가들의 역할 모델이 되고 있다.

중졸이면 어떻고, 고졸이면 어떤가?실력을 갖추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화려한 포장과 명성을 좇는 사회 분위기가 존재하는 한 후진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증명서 하나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간판 만능주의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마땅하다. 이번 신정아씨 사건이 우리 사회에 남긴 가장 큰 교훈이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2007-07-2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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