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주영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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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5-01-29 10:47
입력 2005-01-29 00:00
참 기발한 발상이 아닌가? 그림을 통해 음식의 역사를 보고, 음식의 역사를 통해 그 시대의 사회상을 엿본다는 것 말이다. 지금까지의 음식사 연구가 백과사전적 혹은 민족적 정체성 확보를 위한 계몽주의적 경향을 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림 속 음식을 통해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신선·발랄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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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안중식이 그린 ‘조일통상장정 기념…
1883년 안중식이 그린 ‘조일통상장정 기념… 1883년 안중식이 그린 ‘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조선과 일본의 통상 교섭 후의 연회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서양음식과 식기,조선 화병 등이 놓여 있는 모양이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음식사의 계몽성 거부… 저자 상상력 덧칠

한국학중앙연구원(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민속학)인 주영하의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사계절 펴냄)는 음식사의 계몽성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도발적이고, 풍속화 속 음식에 돋보기를 들이댔다는 점에선 문화적이다. 저자는 ‘음식의 변화상은 이른바 ‘유행’이라는 풍속의 그릇에 시대정신을 오롯이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 책을 썼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대부분 조선 후기에 그려진 23편의 풍속화에 담긴 음식과 인물들에게 돋보기를 대고, 그림 안팎을 넘나들며 나는 듯 펼쳐나가는 저자의 상상력이 유독 돋보인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나무들 사이에 비석이 뽐내듯이 서 있다. 그 아래 난 길에 아이를 안은 아낙이 쓰개치마를 머리에 두르고 겸연쩍은 듯 황소의 등에 올린 등거리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갓과 두루마기를 갖추어 입은 양반이 술 한 잔으로 들병이와 수작을 부리다가, 갑자기 나타난 젊은 양반 부부에 놀란 듯 오른손으로 하릴없이 귓밥을 만지작 거린다.’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병’(行旅風俗圖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대한 묘사다. 지은이는 그림에 ‘노방노파’(路榜 婆)란 화제(畵題)를 붙였다. 그림의 주인공이 노방(길가)의 노파(술독을 지키는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술이다. 노파의 독에 담긴 술은 청명주나, 한산소국주 같은 ‘앉은뱅이’ 술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야 객지를 떠돌아 성읍에 다다른 과객의 호주머니를 훔칠 수 있지 않겠는가!

김홍도의 ‘벼타작’(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저자가 보는 것은 타작에 여념이 없는 농군들 옆에 돗자리를 펴고 비스듬히 누워 곰방대를 문 채 졸고 있는 양반, 아니 양반 같은 이다. 거드름이 잔뜩 밴 그는 ‘분명 소작인의 타작을 감시하기 위해 온 지주의 대행인 마름’이라는 게 저자의 상상이다. 그 옆엔 술병과 술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비록 소작인이라 ‘반타작’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타작은 즐거운 듯 얼굴마다 웃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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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타작하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린 김홍…
벼를 타작하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린 김홍… 벼를 타작하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린 김홍도의 ‘벼타작’.


농군옆에 술병 놓고 졸고있는 양반…

이어 음식인 쌀에 대한 ‘수다’가 시작된다. 한국 음식의 반찬은 쌀밥을 먹기 위해 마련된 부식이라는 이야기부터 쌀로 만든 술과 과자, 제물로서의 쌀,‘쌀의 나라’이면서도 몰락해가는 현대의 쌀밥 등등.

19세기 작품인 ‘야연’(野宴·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 이르면 소나무 아래서 기생들을 옆에 끼고 숯불에 쇠고기를 구워 먹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양반들의 주연이 마냥 흥청거린다.

여기서 지은이는 동국세시기를 지은 홍석모(洪錫謨)를 떠올린다. 홍석모가 이 풍경을 보았다면 아마 “요사이 한양풍속에 화로에 숯불을 활활 피워놓고 번철을 올려놓은 다음 쇠고기를 기름·간장·계란·파·마늘·고춧가루에 조리하여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다. 이것을 난로회(煖爐會)라 한다.”고 동국세시기에 기록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상상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남자 다섯에 여자 둘. 지은이가 보기에 이들은 권세가들과 기생이다. 어지간히 취했을 법한 남정네들이 기생들과 어우러져 즐겼을 듯한 걸죽한 입담을 지은이 또한 거침없이 펼쳐나가고 있다.

안중식의 작품인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기념 연회도’엔 서양음식이 등장한다. 조선 관리 몇 사람과 일본 사람, 서구적 풍모의 인물들이 사각 식탁에 둘러앉아 있다. 각자 앞엔 접시와 나이프·스푼 등 서양식기가 세팅돼 있고, 상 중앙엔 꽃을 담은 조선꽃병이 서양식 촛대와 함께 놓여 있다. 마치 양복 입고 갓 쓴 어색함이 가득해 절로 웃음이 터진다.

이 그림은 1883년(고종 20) 6월22일 조선측 전권대신인 민영복과 일본측 전권대신인 다케조에 신이치 사이에 조인된 조일통상장정 조인식을 끝낸 뒤 있었던 연회를 그린 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자리 배치인데, 양 협상 당사자가 마주 앉지 않고 상석에 앉은 민영목 오른쪽으로 다케조에가 아랫사람 입장에서 앉아 있는 모습이다.

시대적·정치적 상황 곁들여 설명

저자는 당시의 복잡한 시대적·정치적 상황을 설명하며 그림의 의미를 풀어본다. 또 커틀릿과 포도주, 위스키가 당시 어떻게 조선 관리들에게 받아들여졌을지 다양한 시각에서 상상력을 발휘한다.

책은 다양한 풍속화에서 서민의 애환이 담긴 음식뿐만 아니라 국가적 행사 때 쓰인 궁중음식, 조선 관료들의 음식을 골고루 끄집어내 조선 사회를 엿손다. 거대담론이 아닌 시시콜콜한 음식이야기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만, 사소한 일상 자체로 역사와 대면하고자 하는 의미심장한 의도가 읽힌다.1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2005-01-29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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