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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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3-10-08 00:00
입력 2003-10-08 00:00
요즘 건망증이 심해졌다.몇몇 친구들 전화번호마저 가물가물할 때도 있다.퇴근하다 보면 어떤 날은 서너 번씩 왔던 길을 오간다.책 한 권 사달라는 아이에게 오늘은 꼭 사온다고 장담하고 문을 나서지만 집에 돌아가 보면 빈손이기 일쑤다.엊그제에는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열쇠를 안에다 두고 문을 잠그기도 했다.

건망증은 죽고 사는 병은 아닌지 몰라도 살아가는 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일정을 열심히 적어도 메모를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한동안 허둥대고 나면 ‘내가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십상이다.때로는 오해도 받는다.건망증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깜빡 잊는지를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건망증이 꼭 몹쓸 것만도 아니다.기억해야 할 것도 망각시키지만 위선과 거짓을 일삼은 사람들 행각도 잊게 해주지 않는가.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기회주의 행태를 서슴지 않는 간교함을 맨정신으로 바라보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건망증이 생활엔 불편해도 정신 건강을 지켜주는 보루라는 생각이 든다.

정인학 논설위원
2003-10-08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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