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장] 영조대왕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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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1-07-26 00:00
입력 2001-07-26 00:00
조선시대 영조는 재위 26년(1750) 5월 홍화문(弘化門)에나가 일반백성들을 만났다.양역(良役) 변통에 관한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듣기 위해서였다.

양역의 대가로 백성들은 1년에 2필의 군포(軍布)를 납부해야 했는데 부유한 양반들이 면세되면서 가난한 백성들만고통을 겪어야 했다.

부정도 만연해 갓난아이나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도 군포를 거뒀다.이를 견디다 못해 도망가면 친척에게 대신 부과시키는 족징(族徵)과 한 가족이 모두 도망가면 그 이웃에게 대신 매기는 인징(隣徵)으로 대응해서 한 마을이 몽땅도망가는 경우도 흔했다.

사실 이 문제의 해답은 간단했다.양반들도 양역의 의무를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 방향으로 영조가 변통(變通),즉개혁을 하려고 하자 양반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어떤 벼슬아치는 “천하는 귀천(貴賤)·후박(厚薄)·대소(大小)·경중(輕重)이 있어 모든 만물이 원래 같지 않다”고 반발했으며 심지어 “일반 백성들의 마음은 잃을지언정 사대부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반대까지 있었다.

기득권층인 양반 사대부들의반대가 이처럼 극심하자 영조는 양역에 대한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듣겠다며 홍화문에 행차한 것이었다.그 소회를 말하면서 “말이 여기에 미치니,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며 흐느꼈다.이는 군부(君父)인 내가 이렇게 애통해 하는데 너희들이 끝내 반대하겠느냐는 정치적 제스처이기도 했다.

양역 변통에 관한 영조의 속마음은 양반가(家)도 똑같이군포를 내는 호포제(戶布制)에 있었고 백성들도 대부분 호포제가 좋다고 하소연했으나 정작 개정된 법률은 호포제가아니라 균역법(均役法)이었다.

균역법은 농민들이 내는 군포(軍布)를 1필로 감해주고 부족한 세수를 다른 방법으로 보충하게 한 것인데 양반들은여전히 제외되었다는 점에서 근본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지엽적인 문제만 손 댄 법이었다.그래서 균역법은 일시 효과는 보았으나 양역문제에 대한 근본해결은 아니어서 조선말기까지 계속 문제가 됐다.

영조의 속마음이 호포제였으면서도 이를 강행하지 못한이유는 물론 양반들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이다.그 배경에는 영조 자신의 당파성이란 문제도 있었다.영조는 노론(老論)이란 당파의 전폭적 지지 덕분에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굴레를 끝내 벗어던지지 못했던 것이다.

애민군주(愛民君主) 영조의 개혁정신과 그 자신의 당파성은 종종 심하게 대립되었고 그때마다 영조는 개혁보다는당파의 이익쪽에 기울었다.그 극단적인 예가 소론과 손잡으려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것이었다.당대제일의 학자이기도 했던 영조가 52년이란 긴 집권기간에도개혁을 완성 못한 이유가 개혁을 추진하는 영조 자신의 자세에 있었다.

현 정권이 집권 후 계속 개혁을 추진했으면서도 국민들의지지율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는 타인에게는 개혁을 요구하다가도 개혁의 방향이 자신에게 향하면 모든 수단을 다해저항하는 우리사회의 극단적 이기주의에도 원인이 있다.

하지만 더 큰 요인은 균역법이 그랬던 것처럼 백성들의질고에 대한 눈물로 시작된 개혁작업이 결국은 균역법처럼용두사미로 끝났던 점과 영조처럼 당파적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영조가 균역법으로 후퇴함으로써 그 자신의 눈물을저버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당파적 이해에서 벗어나 문제의 근본을 뿌리뽑는 개혁을 추진하는 길 뿐이었다.그것은 또한 현 정권 출범 초기에 흘렸던 눈물을 저버리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2001-07-26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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