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34)현기영 소설집 순이 삼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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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9-09-09 00:00
입력 1999-09-09 00:00
1979년 10·26직후의 한국 사회는 희망과 환멸이 착종하는 혼란의 연속이었다.독재체제 지지 세력이나 민주화 세력 그 어느 쪽도 기선을 잡을 수 없었던 이 소용돌이에서 군부의 가장 야심적이고 조직적이었던 한 세력이 집권의야망을 실현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11월10일,최규하 대통령 대행은 현행(유신) 헌법의 수속에 기초하여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 뒤, 각계 의견을 수렴하여 개헌을 추진한다는 요지의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각계에서는 즉각 그 부당성에 대한 성명이 잇따랐고,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해제 및 정치범 석방 요구가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었다.제주도를 제외한 전국비상계엄령(10.27)은 집회 시위를 허가제로 핍박했는데 그 첫 희생자가 현한나라당 이부영의원이었다.윤보선 전대통령 댁에서 재야 5개단체 집회를 개최(11월13일)하여 유신 철폐와 긴급조치 해제를 주도한 것이 구속(11월17일)요건이었다.

이미 외국의 한 신문은 한국 정치체제의 새 방향은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동향에 달렸다는 기사를 흘릴 정도로 세력의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런어수선한 때에 민주화 운동권 인사들 앞으로 이상한 결혼 청첩장이 배달되었다.홍성엽이란 총각이 장가 드는 내용의 이 청첩장은 결혼식이 11월24일 토요일 오후 명동 YWCA회관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세칭 위장결혼사건이다.

‘통일주최 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가 주축이 된 이 계엄하의 집회를 위한 위장 결혼식에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해직교수 협의회,제적 학생을 중심으로 천 여명이 모여 유신 정부와그 정당 퇴진과 거국내각 조직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미학주의적인 단편 ‘아버지’로 등단한 작가현기영은 당시 서울 사대부속 고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면서 “스스로 기만적인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제주도 출신인 현기영에게 고향의 비극 이야기는 원죄의식처럼 뇌리에 새겨져 이를 벗어 던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문학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등단 직후부터 방학 때면 제주 4.3항쟁에 관한각종 자료를 모으고자 했으나어디서고 빈 손으로만 돌아올 뿐이었던 그 답답함을 이 작가는 고향의 현지 취재로 정신적 허기를 채워 세 작품을 썼다.

‘순이 삼촌’(창작과 비평 1978 여름),‘해룡 이야기’(문예중앙 1979 가을),‘도령마루의 가마귀’(문학과 지성 1979 가을)을 연이어 발표하여 문단으로부터 좋은 방향을 얻은 터라 이내 첫 창작집 제목을 ‘순이 삼촌’(창작과비평사 1979.11)으로 엮어 냈다.

갓나온 따끈다끈한 첫 창작집을 현기영은 고향 출신 후배들,특히 자신이 주도하고 있던 친목회원들에게 꼭 읽히고 싶어 마침 11월24일 토요일 오후 명동 YWCA로 몇 권 갖고갔다.

제주 출신들이 이름도 없이 서럽게 모였던 이 친목회가 바로 나중에 제주 사회문제 협의회로 발전하는 모체였다.서울대 재학 중 제적당했던 강창일(현배재대 교수).고은수(현 고교교사)를 비롯한 몇몇 후배들과 함께 참가했던현기영은 집회 도중 들이닥친 무더기 연행 사태속에 무사히 귀가했으나 한후배가 바로 연행 당해 갖은 고초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집회 참가 그 자체를 문제 삼았던 터라 애초에는친목회의 성격과 구성에 대하여 집중 추궁을 당했으나,마침 고향 선배로부터 한 권 얻어 지니고 있던단편집 ‘순이삼촌’이 심문의 도마에 오르게 되었다.바로 현기영의 ‘순이삼촌’ 필화 사건의 발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1999-09-09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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