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몫/윤대녕 소설가(굄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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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4-12-20 00:00
입력 1994-12-20 00:00
개인적인 얘기지만 내가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허윤석 선생의 「유두」라는 짧은 소설 때문이었다.삶과 운명의 모습을 이토록 소금 같은 언어로 조탁해 놓은 작품을 일찍이 나는 본 적이 없다.

비만 오면 마당에 이끼가 드는 집,아픈 아내와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무지렁이 농부.어느 날 아내가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죽어 비가 오는 날 아이를 울리며 산으로 간다.사내는 이 몹쓸 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고 아이를 업고 물이 분 강을 건너려 한다.그때 아이가 말없이 제 아비의 뒷덜미를 잡아끈다.사내는 버리고 온 집 마당에 아이가 심어놓은 살구나무가 생각나 다시 발길을 돌려 아내가 죽은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요즘 새삼스럽게 「사람」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해 보곤 한다.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받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어느 누구도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그러나 그게 어찌 내 뜻대로 되랴.그게 자업자득이든 불의에서 비롯된 것이든 여하튼 운명이란 말까지 들먹거릴필요는 없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산다.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남의 고통을 끌어안고 제 고통과 화해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행복한 사람들은 잠재의식 속에서 늘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행복에는 반드시 대가가 뒤따른다는 우리네 풍속 관념 때문인지,아니면 그게 우리 사회의 모순과 결부된 행복의 출신성분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바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이웃의 고통이나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그리고 이들이 지고 있는 고통의 몫으로 세상은 가난하게 유지되고 있다.저 이끼 낀 마당에 심어놓은 살구나무를 떠날 수 없어 제가 버렸던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농부의 마음 때문에 말이다.세상도 나이를 한 살 더 먹어가는 연말이다.그러나 언제까지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바로 그들 자신이 돌봐줘야 하며,세상의 고통을 담보로 사는 행복한 자들은 이때마다 문을 걸어닫고 제 포만함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일까.
1994-12-2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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