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세상 구원은 없는가?
이는 ‘차가운 바람 가득한 이 세상에/너희는 발가벗은 아이로 태어났다’로 시작해서 ‘차가운 바람 가득한 이 세상을/너흰 온통 딱지와 흠집에 뒤덮여 떠나간다/두 줌의 흙이 던져질 때는/거의 누구나 이 세상을 사랑했었다’로 끝나는 브레히트의 시 ‘세상의 친절’이 전하는 섬뜩한 현실인식과 맥을 같이 한다. 한가닥 위안이나 작은 희망의 빛조차 기대할 수 없는 삭막한 세상에 대한 직시(直視)다.
소설의 주인공은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기간제 교사 승재와 그를 흠모하는 여고생 유리. 승재는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끔찍한 학대를 당했고, 학창시절엔 성적인 폭력으로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겪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불행한 성장과정은 그에게 지킬박사와 하이드같은 이중 자아를 갖게 했다.
유리 역시 암투병 중인 아버지와 바람난 엄마 사이에서 소외된 존재다. 유리는 신도시 학교로 전학온 첫날 승재가 자신에게 보였던 사소한 친절에 감동해 그를 흠모하게 된다. 우연히 승재의 뒤를 밟게 된 유리는 점점 그의 일상에 가까이 다가간다. 하지만 유리의 친절은 승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살인미수사건의 범인임을 증명하는 단서가 되고, 승재는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결국 목을 맨다.
미로같은 세상에서 구원의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랭보의 시구를 인용한 작가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그러나 도움의 손길같은 것은 없다. 새로운 시간이란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엄정한 것이다.’
1986년 ‘여성동아’ 장편공모에 ‘저 석양빛’이 당선돼 소설가로 데뷔한 작가는 ‘사십세’‘플라스틱 섹스’‘황홀’등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이면의 황폐화된 인간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작품들을 선보여왔다.9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