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숙의 새 시집 ‘혜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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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10-07 08:14
입력 2004-10-07 00:00
‘어렵게 쓴 시’를 읽는 즐거움이 있다.그런 시를 낳은 시인에게서는 향기가 난다.시인의 천착이 낳은 기이하고 아름다운 향기.박진숙의 새 시집 ‘혜초일기’(문학세계사 펴냄)는 이처럼 집요하게,그러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한사코 한 곳으로 걸음을 모아가는 탁발승의 노정 같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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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숙 시인
박진숙 시인 박진숙 시인
삶을 말하지만 그의 은유는 단호하다.‘나는/태어나지도 않았고/살지도 않았다/따라서 죽는 것도 없다’(금강경에 부쳐)에서 보듯 그는 시적(詩的) 적멸을 노리는 구도자로 고행 속에 홀로 서 있다.시인 정일근이 무뇌(無腦)의 적멸을 말했듯,시인은 길의 끝을 감춘 채 길게 누운 지평선의 점 하나로 소실해 가는 존재의 의미를 불교적 이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혼자일 뿐’인 그의 자리에서 드러내 보이는 시적 매조지는 종교적 지향을 일상적인 것으로 환원시키는 힘이 배어 있다.‘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의 절대성에 함몰해 가면서도 ‘나’와 함께 ‘우리’라는 끈을 놓지 않는 그의 사회성은 시편 곳곳에서 더러는 연대의식으로,더러는 고독감으로 표출된다.인간이 가진 불가피한 현실인식의 그늘이다.

지고한 불법(佛法)을 찾아 미당이 먼저 간 ‘진달래 꽃비오는 서역 삼만리’를 마치 낙타처럼 되짚어 가는 그는 순례로 지쳐가는 자신을 향해 한사코 피학의 아포리즘을 생산해 낸다.‘천상의 선인들도/때가 되면 옷이 더러워지고/몸에선 냄새가 나고/머리에 꽂은 꽃은 시들고/악기는 낡아 노래도 목이 쉰다는/한 때뿐인 목숨’(불퇴전1-혜초일기 61)이라며 세상이 절대라고 믿는 모든 것에 회의하는 그는 이윽고 ‘불어닥친 한순간의 폭풍 속에서/가야 할 길을 실날처럼 잡고/아비발치,/아비발치,/오늘 그 상사의 지옥을 독사처럼 물어뜯는/저를,/스승이여 죽비를 들어 꾸짖기만 하시겠습니까’라며 목어처럼 우짖는다.

이를 두고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세상과 삶의 이치에 대한 ‘혜초일기’의 시적 사유들은 범접할 수 없는 진정성에 닿아 있다.거기에는 칼끝과 같은 긴장감이 감돈다.”고 읽고 있다.시 세계에서 맨발의 혜초가 되어 천축국에 다다르고자 하는 그의 여정은 멀다.너무 멀어서 ‘살아서 다다를 수 없는 것’이지만 그는 그 길을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적어도 자신의 사유 속에서만큼은 삶이 법륜의 황금 테두리처럼 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외길이라는 진리를 깨우치기라도 한 듯.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2004-10-07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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