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화제] KAIST 영어서툰 교수 ‘진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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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10-16 11:28
입력 2004-10-16 00:00
영어가 서툰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요즘 괴롭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로플린(54) 총장이 취임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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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로플린 KAIST 총장이 지난 9일 총장배 마라톤대회에서 완주한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KAIST 제공
로버트 로플린 KAIST 총장이 지난 9일 총장배 마라톤대회에서 완주한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KAIST 제공
15일로 취임 3개월이 된 로플린 총장은 지난달 13일부터 학과를 돌면서 통역없이 교수들과 면담을 하고 있다.19개 학과 중 이날까지 14개 학과가 면담을 마쳤다. 아직도 교수 400명 중 90여명이 그와의 ‘첫 만남’을 기다리고 있으나 영어가 달리는 교수는 초긴장 상태다.

지난 1일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총장과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들의 면담시간. 이 학과 교수 6명이 로플린 총장과 마주앉아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국내 최고의 과학영재를 가르치는 교수들의 전공실력이야 처질 게 없었다. 일본에서 학위를 딴 어느 교수는 자기소개만 간단히 영어로 할 수밖에 없었다.

캠퍼스 산책하다 학생과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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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야를 연구하느냐.”,“학교가 무얼 도와주면 좋겠느냐.”고 로플린 총장이 꼬치꼬치 물어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다행히 영어를 잘 하는 동료 교수가 옆에서 도와줘 위기를 넘겼지만 진땀을 뺐다. 이 학과 남택진(36) 교수는 “과거에는 학과장이 대표로 브리핑하는 데 그쳤으나 학과를 돌면서 총장이 교수들과 손수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물리학과 면담이 있었던 지난달 24일에는 교수들의 영어는 술술 풀렸지만 총장은 자신의 전공인 탓에 신이 난 듯 면담은 아침 9시부터 저녁까지 이어졌다. 이 학과 신중훈(36) 교수는 “총장님께서 호기심이 무척 많은 것 같다.”고 전했다. 로플린 총장은 교수진의 영어실력에 대해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평가했으며, 교수들의 연구내용을 파악하고서는 “스탠퍼드대 수준과 같다. 흥분된다.”고 말했다고 학교 관계자는 전했다.

된장찌개 즐기고 주말엔 하이킹>

학교에서는 영어 능통자를 상대로 총장 관용차 운전사를 공모했다가 지원자가 없어 포기하기도 했다. 결국 학교차량운행 용역업체 사장이 맡았다. 학교 관계자는 “영어 잘 하는 수행비서가 동행하지만 그가 아니어도 몸짓이나 표정만으로도 통한다.”고 웃었다.

로플린 총장은 거꾸로 지난 12일 국정감사에서 ‘한국어 테스트’를 받았다. 비록 한국어를 소리나는 대로 영어로 쓴 것을 읽었지만 꽤 유창했다. 국감 후 그는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며 “긴장됐지만 미국과 달리 의원들이 대학 교육에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는 게 신기하고 놀랍다.”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에피소드 하나. 지난 8월 초 로플린 총장은 자신을 석좌교수로 임명하기 위한 논문심사에서 교수들로부터 “양보다 질”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심사에 참여했던 강창원 교무처장은 “양으로 따지던 옛 KAIST 교수들의 기준으로 보면 총장님의 논문량이 좀 적어 이런 우스갯소리가 나왔다.”고 전했다. 로플린 총장이 지난 95년부터 써온 논문은 19편. 같은 기간이라면 KAIST 교수들은 40편 꼴로 쓰는 데 비해 적은 숫자다.

로플린 총장의 지난 3개월은 신선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캠퍼스를 산책하거나, 길을 걷다가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전에 없던 일이다.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학교 앞 갑천변으로 하이킹을 나가는 장면도 종종 눈에 띈다.

점심은 ‘다이어트’를 위해 거르고 한·중·양식을 고루 즐긴다. 구내식당은 잘 안 가고 외식을 많이 한다.

교내 공관에서 손수 요리해 먹는 때도 많다. 된장찌개를 즐기는데 밥은 거의 손을 안 대고 찌개만 마치 양식의 ‘수프’를 먹듯이 한다고 학교 관계자는 전했다. 퇴근 후엔 교내 공관에서 저술작업을 하고 있다.

총장실에는 동양화와 서예 액자만 남기고 자신의 책을 들여놓았다.

창가에는 수십개의 화분을 늘어놓아 장식했다.1998년 받은 노벨 물리학상 메달과 상장도 이곳으로 옮겨와 경보장치를 한 뒤 보관하고 있다.

남 교수는 “영어가 서툰 일부 교수님은 할 말을 하고 싶어도 주뼛주뼛할 수 있지만 대부분 교수들은 소탈한 데다 자유분방한 총장의 모습에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교수는 “로플린 총장의 취임과 더불어 실질적인 재정지원을 바라는 교수들도 많다.”고 슬쩍 귀띔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2004-10-1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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