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한국 정치와 행정에서 법의 역할/이성엽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수정 2016-08-24 17:57
입력 2016-08-24 17:56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이런 이상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 같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몇몇 법조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최고의 엘리트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어떤 법조인들은 사회 구성원의 행동양식을 변화시키는 데 법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믿는 것 같다. 반대로 정치, 행정은 법을 그들을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와 행정은 국회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법을 제정했다면 그 법의 목적이나 내용은 문제 삼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법을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최근 다른 측면에서 정치, 행정의 법 의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소위 ‘정치의 사법화(司法化)’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신행정 수도 건설, 김영란법 관련 헌법재판소의 위헌 여부 결정과 같이 사법에 의해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현안들이 해결되는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정치 영역과 민주적 공론 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할 사안들이 소수 엘리트 법관들에 의해 결정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이 처한 법 현실 중 가장 큰 문제는 비현실적 엄격한 법령과 행정의 재량권 확대로 인해 잠재적 처벌 대상이 무한정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법 집행이나 법 준수가 어려운 엄격한, 과도한 수준의 법령이 계속 제정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개인정보 보호 관련 법령의 경우 보호와 이용의 조화가 아닌 보호에만 치중하면서 누구도 준수하기 어려운 법령이 되고 있다. 이런 경우 행정도 법 준수를 강요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알고 집행을 망설이다가 여론상 필요한 경우 제재에 착수한다. 수범자인 국민이나 기업은 어차피 법을 지키기 어려우니 단속을 피하면 되는 것으로 보다가 제재를 받게 되는 경우 제재의 형평성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된다. 또한 제재의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각종 행정규제법은 모두 형사처벌 조항을 두면서 과잉범죄화의 우려도 나타나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전과자 수는 2010년 기준 1100여만명으로, 15세 이상 인구 대비 비중이 26.5%에 이르고 있다.
정치, 행정, 법은 사회에서 조금은 다른 역할을 하고 있지만 국민의 행복한 삶의 보장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상호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한편이 다른 한편을 도구로 삼거나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 정치, 행정, 법은 모두 공공부문에 속해 공익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사익을 추구하는 민간 부문과는 달라야 한다. 그들에 주어진 권한은 특별한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익 추구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2016-08-2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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