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이두황 단죄비/박건승 논설위원
박건승 기자
수정 2017-03-05 18:13
입력 2017-03-05 18:04
이두황은 조선·대한제국의 무신이다.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1858년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장성한 뒤로는 주로 호남에서 친일부역자로 활동했다. 1894년 1, 2차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초토영군(剿討營軍)에 임명돼 동학군을 토벌·학살하는 데 앞장섰다. 1895년 을미사변 때 초대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 자객이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데 길을 열어 준 인물도 바로 그다. 도성 훈련대 1대대장으로 2대대장인 우범선과 함께 경비병사를 데리고 경복궁에 난입해 일본 낭인들을 도왔다. 우범선은 ‘씨 없는 수박’ 하면 떠오르는 우장춘 박사의 부친이다. 이두황은 이 일로 일본으로 도망가 10여년을 보냈다. 항일 의병 투쟁기였던 1908년을 전후해 호남 의병운동을 초토화하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엔 일제의 토지수탈을 도왔다. 그의 묘 제단은 일본식으로 꾸며졌고 묘비명은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썼다고 한다. 일제가 그의 충성심을 얼마나 높이 샀으면 ‘한국병합 기념장’과 ‘천황 즉위 기념장’을 수여하고 1만 2000평을 묘지 터로 줘서 부귀영화를 대물림토록 했겠는가.
이 시대에도 친일파 조상을 둔 덕분에 호의호식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테다. 현 정부와 집권당이 친일교과서로 의혹받는 국정 역사교과서에 미련을 못 버린 이유를 거듭 곱씹어 볼 일이다. 얼마 전 3·1절 기념사에서 “‘위안부 합의’를 진실로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두고 한 야당 대표가 “친일이 체질화된 사람”이라고 힐난했다. 물론 정부 대 정부의 합의인 만큼 정부의 입장이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날이 어떤 날이고,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일본 측의 소녀상 이전, 철거 요구로 분노하는 현실에서 천연덕스럽게 그런 기념사를 한 것이 온당했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단죄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이두황 단죄비’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r
2017-03-06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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