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내가 바라던 나/최나욱 작가·건축가
수정 2023-12-14 10:10
입력 2023-12-13 23:40
![최나욱 작가 겸 건축가 최나욱 작가 겸 건축가](https://img.seoul.co.kr/img/upload/2023/08/09/SSC_20230809235620_O2.jpg)
그러나 막상 꿈꾸던 자리에 오르고 나면 ‘나이가 들고 보니 어쩔 수 없더라’ 합리화하거나, 심지어는 기억도 못 하기가 부지기수다. 어릴 때의 다짐은 ‘그때’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였지만, 시간이 빠르게 지나면 지날수록 ‘이때’를 살아가기에 급급한 탓이다.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나 그때의 다짐을 복기할 때면 ‘그때는 뭘 몰랐나 봐’ 하고 지난 생각을 정정하거나, 변화한 현실의 속성을 운운하며 지키지 못한 자신과의 약속을 합리화한다.
과연 내 어린 시절은 지금 내 모습에 흡족해할까. 2년 전 이맘때 세상을 떠난 루이비통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질 아블로는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은 17살 시절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감히 어릴 적에는 상상할 수 없는 문화의 최전선에 있으면서도 ‘어릴 적 자신’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벤츠, 리모와, 나이키 등 온갖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하고, 발매한 신발이 뉴욕 아파트 임대료를 호가하고, 전 세계 모두가 현재 자신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와중에 말이다.
![버질 아블로 사후 치러진 오프화이트의 2022 F/W 패션쇼의 선두에는 생전 그가 조명한 한국의 디자인 스튜디오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PAF)’의 작업물이 섰다. ©OFF-WHITE 버질 아블로 사후 치러진 오프화이트의 2022 F/W 패션쇼의 선두에는 생전 그가 조명한 한국의 디자인 스튜디오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PAF)’의 작업물이 섰다. ©OFF-WHITE](https://img.seoul.co.kr/img/upload/2023/12/14/SSC_20231214101031_O2.jpg)
이따금 ‘인맥이 전부’라는 씁쓸한 농담이 오가는 패션 분야에서 ‘실력이 우선’이라는 소년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오갈 수 있었다. 발 빠른 문화일수록 ‘언제나 좋은 것’을 잊지 않고 추구하기란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가.
변화 많은 세상에서 이따금 나 역시 일시적인 선택을 하고 있지 않나 싶을 때면 올여름 세상을 떠난 소설가 밀란 쿤데라를 떠올린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첫 장을 여는 내용이자 그의 작품 세계를 뒷받침하고 있는 ‘영원회귀’는 ‘우리의 선택이 무한히 그대로 반복되는 것’을 묻는 사고 실험이다.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 4중주 16번에 가사처럼 쓰인 모티프 ‘그래야만 하나?(Muss es sein?)’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는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토마시의 테마 음악이다.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 4중주 16번에 가사처럼 쓰인 모티프 ‘그래야만 하나?(Muss es sein?)’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는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토마시의 테마 음악이다.](https://img.seoul.co.kr/img/upload/2023/12/14/SSC_20231214101032_O2.jpg)
해가 바뀌며 다짐을 새로 하면서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정말 내가 바라는 것인지, 혹은 내가 그토록 원했으나 잊은 가치는 있지 않은지를 되뇐다.
매일매일 많은 변화에도 ‘모든 건 반드시 사라지고 그렇기에 영원을 생각한다’던 쿤데라의 철학은, 그리고 계속해서 좋아 보이는 것들이 나타나더라도 ‘17살 시절 내가 좋아한 것’을 우선시하는 아블로의 가치 기준은 새해를 단단히 맞이하게 한다.
2023-12-14 3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