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현대판 로빈후드/이순녀 논설위원
수정 2009-11-27 12:00
입력 2009-11-27 12:00
FBI에겐 ‘공공의 적’이었지만 국민은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시민의 돈은 노리지 않고 불황의 원인으로 지탄받는 은행 돈만 골라 턴 그를 현대판 로빈후드, 의적(義賊)으로 여긴 것이다. 올 여름 개봉한 조니 뎁 주연의 ‘퍼블릭 에너미’는 바로 이 존 딜린저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의적의 대명사로 서양에선 로빈후드를, 우리나라에선 홍길동을 꼽는다. 잉글랜드 민담에 등장하는 로빈후드와 허균의 소설 주인공 홍길동은 포악한 관리와 탐욕스런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사적인 정의를 실현한다. ‘의적, 정의를 훔치다’의 저자 박홍규 영남대 교수에 따르면 의적 이야기는 당대 사회의 모순과 민중의 염원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산적(밴디트) 출신의 인도 여성 국회의원 풀란 데비는 지독한 계급제도에 대한 항거의 표상이며,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열차 강도 제시 제임스는 신흥 자본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을 토대로 호응을 얻었다.
부자들의 계좌에서 돈을 인출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빌려준 독일의 한 은행원이 화제다. 라인란트 은행의 전직 지점장인 60대 여성 슈미트는 부자들의 통장에서 돈을 빼내 빚 때문에 계좌가 묶인 채무자들의 통장에 잠시 이체했다가 빚 갚을 여력이 생기면 원상복구하는 수법으로 3년간 760만유로(약 131억원)를 빼돌렸다. 법원은 그녀가 오로지 동정심 때문에 그랬고, 10원 한 장 따로 챙기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의적도 도둑이고, 선의가 범죄를 정당화할 순 없지만 남의 불행은 아랑곳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요즘, 남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현대판 로빈후드가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2009-11-2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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