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오시·베시·보시/육철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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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9-11-09 12:32
입력 2009-11-09 12:00
독일 통일 이후에 신조어들이 넘쳐났다. 그 중 대표적인 게 오시(Ossi)와 베시(Wessi), 그리고 보시(Wossi)다. 오시와 베시는 좀 점잖게 표현하면 ‘동독 것들’, ‘서독 것들’이란 의미다. 하지만 동서독인 사이에 좋지 않은 용도로 종종 쓰였고,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 용어다. 서독인들은 ‘게으르고 불평만 늘어놓는 동독X’이란 뜻으로 오시를 사용했다. 반면 동독인들이 말하는 베시는 ‘거드름 피우며 잘난 척하는 서독X’이다. 서로 나쁘게 표현하는 말이지만 뉘앙스는 다소 다르다. 오시는 동독인을 향한 경멸조를 풍긴다. 베시에는 서독인에 대한 부러움이 스며 있다. 보시는 베시와 오시의 합성어쯤 되는데, 아주 좋은 의미다. 동독인을 잘 이해하고,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그들의 순수함을 좋아하는 서독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실 동독 출신인 앙겔라 메르켈 현 총리는 정계 입문 당시 서독 출신에게 무시당하는 느낌을 가졌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1995년 헬무트 콜 내각에 환경장관으로 입각한 그는 서독 출신의 노련한 정치인의 끈을 잡으려고 남몰래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고 한다.

오늘은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독일이 그간 동독재건에 쓴 돈은 총 1조 3000억유로(약 2260조원). 덕분에 동독지역의 경제는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동독인들의 정치성향은 ‘왼쪽’으로 끌리는 추세다. 통일 초기에 중도우파인 기민당(CDU)-기사당(CSU) 연합이 동·서독에서 골고루 지지를 받았다. 최근 10년 동안 동독인들의 표심이 변하면서 중도좌파인 사민당(SPD)에 이어 좌파당(Die Linke)이 약진하는 추세다. 동독인들의 관심사가 부(富)의 재분배에 있다는 방증이다. 동독인의 실질소득이 서독인의 77%에 불과한 점이 정치 지형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비교적 ‘치밀하게 준비된 통일’을 이룬 독일에 ‘1등 국민’ 베시와 ‘2등 국민’ 오시가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은 통일 후유증이 만만찮다는 뜻일 게다. 독일에는 그래도 마음 따뜻한 보시들이 많아 사회적 융합과 안정이 빠르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 하지만 탈북자조차 제대로 품지 못하는 우리에게 어느날 갑자기 통일이 닥치면…. 뒷일이 참으로 걱정이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2009-11-0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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