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어떤 데이트/진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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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9-06-03 00:00
입력 2009-06-03 00:00
밤 11시. 그렇고 그런 일에 마음 상한 그녀에게 데이트를 청했다. “드라이브나 하죠.” 너무 늦지 않았느냐는 답 너머로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대로 차를 몰았다. 서울역과 삼각지, 용산을 지나 제1한강교를 건넜다. 그러고 잠시….

“이쯤 아니에요?” “글쎄다. 너무 많이 바뀌어서 도통…” 좁아진 골목과 계단, 그리고 빼곡히 들어선 다세대주택들 사이를 숨은 그림 찾듯 한참 기웃댔다. 그러고 또 잠시….



있·었·다! 상도동 장승배기 어릴 적 살던 그 옛집이, 앞집 옆집 뒷집 다들 2층 3층으로 올리고 넓히고 했는데, 30년이 흘렀는데, 단층 기와집 그대로 푹 파묻힌 채, 있었다. 벌겋게 쇤 청록색 철대문 앞에서 칠순 노파와 40대 후반의 중년 아들도 감전된 듯, 멍하니, 그대로 있었다. 세월이 눌렀을까. 무겁게 내려앉은 지붕 밑으로 불빛이 느릿느릿 기어나왔고, 그 갈피로 칠순 노파와 중년 아들은 30년 전 까까머리 중학생과 지금의 중년아들보다 젊었을 엄마를, 한참을 더듬었다. 언뜻 불빛 속에서 마루문을 여는 엄마가 뭐라 한다. 어디 갔다 이제 왔니.

진경호 논설위원
2009-06-0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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