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우리에게 역사의 신은 있는가/ 김종면 문화부장
수정 2008-04-18 00:00
입력 2008-04-18 00:00
딱한 일은 또 있다. 한 관변단체가 주관한 시험에선 출제위원이 ‘천변풍경’ 문제를 내려 했다가 석연찮은 이유로 출제가 보류된 적도 있다. 가히 ‘천변풍경’ 수난시대였다.
그럼 ‘천변풍경’은 어떤 소설인가. 월탄 박종화는 서울 토박이 말을 사용한 ‘경알이문학’(서울문학)의 표상으로 삼았고, 춘원 이광수는 “내가 읽은 가장 인상깊은 소설”이라며 찬탄해마지 않았다. 제6차 교과과정이 적용된 1994년 이후엔 문학 교과서에도 실리며 청소년들의 ‘필독서’가 됐다. 서울대는 한국고전 100선 목록에 올려 일독을 권하고 있다.
이런 작품에 그처럼 마(魔)가 낀 것은 우리 문화가 아직도 타율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이제 와서 지난 일들을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도 문화의 자율성이 훼손돼선 안 된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유혹 앞에 문화적 명분은 내동댕이쳐지기 일쑤다. 문화는 지금 이 순간도 정치에 치여 신음하고 있다. 최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발언으로 촉발된 문화계 코드인사 퇴진 논란만 해도 그렇다.‘천변풍경’의 경우와 차원은 물론 다르지만, 둘 다 정치가 개입해 문화를 죽이는 꼴이란 점에선 똑같다.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쪽도, 버티기로 맞서는 쪽도 정치생각만 있지 문화생각은 없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최고라는 독선과 아집의 정치만 춤춘다.
“계속 잡음을 일으키는 분들”의 퇴진과 관련, 유 장관은 성숙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나누고 귀 기울이고 보듬어 가는 유연한 리더십을 보여줬다기보다는 군림하고 지배하는 ‘헤드십’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최근 미국의 대선게임을 취재한 뉴스위크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지금은 “머리와 가슴이 맞서면, 가슴이 이기는(When It’s Head versus Heart,The Heart Wins) 시대다. 물갈이를 하든 조직개편을 하든 지금 유 장관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감성의 리더십, 설득과 소통의 추진력이다. 문화계 전반에 신뢰의 인프라를 까는 일이 시급하다.
취임 후 유 장관의 행보를 비판하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낸 “권력이란 낮술에 취해 폭력의 칼을 휘둘러대는 망나니…”라는 막말 성명은 피아(彼我)밖에 없는 살벌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아무리 억장이 무너지기로서니 이게 어디 문화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할 말인가. 퇴진 논란의 핵인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과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바로 이 단체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무엇이 정의이고 진실인가. 선(善)을 지향하는 역사의 신이 존재한다면, 누구도 그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다. 이 시점에서 개인의 명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문화계 전체가 상처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떳떳하게 ‘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시대가 더이상 요구하지 않는다면, 난 나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나귀를 거꾸로 타고라도 떠나고 말겠다. 그게 그나마 구겨진 명예를 살리는 길이요, 문화의 자율성을 지키는 방도다.
김종면 문화부장
2008-04-1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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