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기호 가나다/임태순 논설위원
임태순 기자
수정 2006-06-03 00:00
입력 2006-06-03 00:00
언젠가 국립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구내 매점에서 한글문양의 우산을 보고 깜짝 놀랐다. 노란 바탕에 아로새겨진 ㄱ,ㄴ,ㄷ,ㄹ,ㅇ 등 한글의 자음은 독특한 조형미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 한글이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그후 한글문양이 새겨진 지갑이나 가방 등을 자주 보게 된다. 독일의 한 백화점에서는 훈민정음 글꼴을 전시하고 있을 정도라고 하니 한글의 디자인으로서의 빼어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글꼴을 다양하게 변형시킬 수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한글의 기초가 되는 가, 나, 다…는 순서를 정하는 데에도 자주 쓰인다. 학교 다닐 때 번호는 이름의 가, 나, 다순으로 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도 가, 나, 다 순이 적용됐다. 새로 중선거구제가 도입되면서 한 정당에서 복수의 후보자가 나오자 선거관리위원회가 정당별 고유 숫자에 후보자 이름의 가, 나, 다순으로 투표용지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묘한 조화를 부렸다. 많은 사람들이 제일 앞에 있는 사람에게 기표를 하는 바람에 이름이 빠른 사람이 무더기로 당선됐다. 그래서 지방의원은 이름순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좀더 짚어보면 이는 주민들이 주권행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후보자와 공약을 면밀히 살펴보지 않고 그저 앞에 있는 사람에게 표를 찍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묻지마 투표였다는 비난도 쏟아진다. 세종대왕이 어리석은 백성을 구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는데 500년이 지난 지금도 백성들은 여전히 우매한 모양이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2006-06-03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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