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화분과 벌인 상생의 길 찾기/이경자 소설가
수정 2005-12-30 00:00
입력 2005-12-30 00:00
두세 달쯤 지나서였다. 문득 화분의 잎사귀들이 햇볕이 들고 나는 남쪽을 향해 자라나고 있는 걸 발견했다. 필경 하루에 조금씩 자랐을 텐데 늘 함께 살고 있는 내 눈엔 완전히 화분의 모양이 변해져서야 알아차렸다. 마치 사람이 머리 위로 팔을 치켜들어서 한쪽으로 젖힌 모양과 같았다. 아, 나는 왜 저렇게 되도록 눈치 차리지 못했을까. 잠시 놀라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물도 줬고 잎사귀의 먼지도 닦아줬었다. 새잎이 나면 기쁘고 기특해서 그 어린 잎을 만져보고 행여 사람의 손독을 탈까 얼른 놓아주기도 하였었다. 잎사귀가 한데 뭉친 채 오스스 떠는 듯한 모습이, 동식물 관계없이 세상에 갓 태어나면 생명은 우선 저렇게 진저리를 치는구나, 싶기도 해서 숙연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것의 ‘태양을 향한 쏠림’은 못 봤던 것이다. 직사광선을 받으려 하는 필사적인 노력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저걸 어떻게 할까. 온 몸을 기형으로 만들며 내게 말하는 저 생명의 외침을 어떻게 할까. 나는 속으로 심각해졌다. 생명으로서의 식물, 그 원초적 욕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했을까? 하루나 이틀에 한 번씩 위치를 바꿔서 절대로 기형을 만들지 ‘못하게’했을까? 그랬어야 옳은 건가? 잠깐, 그럴듯했다. 진작 그렇게 할 걸,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버렸다. 그건 식물의 본능적 욕구를 해결하는 건 아니었다. 한 쪽으로 쏠리며 자라는 식물이 보기 싫거나 그렇게 자라는 건 ‘병신’이라고 여기는, 화분의 소유주인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이었다.
어쨌든 거실의 균형을 위해선 화분이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그 자리에 있어줌으로써 거실의 분위기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아열대가 생명의 고향인 식물은 직사광선을 몸에 쪼일 수 있는 남향에 있어야 살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사람인 나와 식물의 욕구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이제 나와 식물이 대화해야 했다. 내가 너를 하루에 한 번씩 방향을 바꿔주겠다. 하지만 기형으로 되었으니 한동안 몸이 바로 되도록 반대 방향으로 놓아주겠다고 하였다. 식물은 즉각적으로 반대했다. 내가 원하는 건 볕이 아니라 직사광선이다! 그래야 산다!고 외쳤다. 나는 외면했다. 내가 널 사온 건 너의 목숨을 귀히 여겨서가 아니라 거실의 균형과 새집증후군의 완화를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식물이 울었다. 그건 취향에 관한 것이고 나의 욕구는 생존에 관한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그 점을 생각해 달라. 화분의 위치를 바꿔주면 기형의 몸이야 바로잡힐지 몰라도 결국은 햇볕이 부족해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식물의 주장이 딱 맞는 말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내 가치관과도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이 나의 인테리어 감각을 비웃을 것이었다. 그러니 넌 그대로 병신인 채 살다가 죽어라. 그게 식물의 팔자다. 넌 내 형편에 좀 비싸지만 그래도 죽으면 다시 사겠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뭔가 개운치 않았다. 며칠 후 화분을 베란다로 내놓았다. 누가 보면 아무 생각 없이 화분을 내놓은 게 됐다. 그러나 그 선택이 나에게 평화를 주었다.‘생명의 존엄’을 선택한 덕이었다.
이경자 소설가
2005-12-3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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