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을사늑약/이용원 논설위원
이용원 기자
수정 2005-11-16 00:00
입력 2005-11-16 00:00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 항일·구국운동의 선봉 격인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는 일본 특사인 이토 히로부미를 비판하는 논설을 잇따라 실어, 훗날 이토에게서 “한국에서 신문이 가진 권력은 비상한데 그 중에서도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제반 악정(惡政)을 반대하여 선동함이 끊이질 않는다.”라는 한탄을 끌어냈다. 장지연의 그 유명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 황성신문에 실린 것도 체결 직후였다.
늑약의 내용이 알려지자 민영환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자결이 잇따랐고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출현했다. 최익현·신돌석·유인석 등이 을사의병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한편 일본 측은 고종이 을사늑약에 찬성하였으며 대신들(을사5적)이 자발적으로 체결에 나섰다고 선전해 한국인들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같은 선전과 달리 고종은 체결 나흘 뒤 황실고문 헐버트에게 총칼의 위협 아래 조인된 을사늑약은 무효임을 만방에 알리도록 지시했다.
모레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100년째 되는 날이다. 이를 앞두고 을사늑약에 고종이 반대하였음을 보여주는 일본측 자료가 공개됐다. 이토가 늑약 체결후 그 과정을 일본 왕에게 보고한 복명서의 초안이 발견된 것이다. 그 초안에는 당초 ‘한국 황제는 대체로 이번 제안에 동의한 것이 아니고’라고 썼다가 그 위에 줄을 긋고 ‘한국 황제가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으로 고쳐 썼다. 고종의 ‘반대’를 ‘동의’로 둔갑시킨 이 초안은 당시 이토를 수행한 스즈키 게이로쿠 추밀원 서기관장이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고종의 동의를 주요 근거로 내세워 을사늑약의 합법성을 주장해온 일본 학자들이 앞으로 어떤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을지 궁금해진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2005-11-16 31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