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강간범,대법원·대검 뭐하나/강지원 변호사
수정 2005-10-06 00:00
입력 2005-10-06 00:00
오늘은 성폭력을 당해 고통 받는 여성들 이야기를 하겠다. 도대체 이 나라 법원과 검찰은 그동안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 왔는가.
한 20대 미혼인 여성은 천성이 소심한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술을 함께 마신, 아는 오빠가 자기 집에 가자고 했다. 혼자 사는 집인데 돌려 줄 책이 있다고 했다. 그러려니 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한순간 침대에 쓰러뜨렸다. 싫다고 했다. 그리고 힘껏 뿌리쳤다. 그러나 끝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큰 소리 한번 쳐 보지 못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두려움과 황당함 때문에 변변한 반항조차 못해보았다.
몇 달 후 수사검사는 가해자 강간무혐의라고 판정했다. 이유는 왜 반항할 수 있었는데 반항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강간죄로 가해자를 처벌하려면 가해자가 피해여성의 반항을 현저하게 곤란하게 할 정도로 강한 폭행이나 협박을 휘둘러야 하는데, 이 사건 가해자는 그저 완력으로 그런 짓을 했을 뿐 그런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뒤집어 표현하면, 피해여성이 필사적으로 반항을 할 때 이를 꼼짝 못하도록 폭력을 행사하고 성관계를 해야 처벌해 주는데, 피해여성이 도무지 반항 같은 반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 남자는 ‘무죄’라는 것이다.
세상에 이 무슨 야만적인 법적 태도인가. 이 나라 어떤 여성이 이 따위의 결정에 승복을 하겠는가. 세상의 사람이 모두 다르듯이 여성도 모두 다르다. 활달한 여성이 있는가 하면 소극적인 여성도 있다. 또 아무리 활달한 여성이라 해도 상대가 직장 상사라든가 신세를 지고 있는 관계라든가 하는 이유로 어려워하는 사이가 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덮쳐 왔다. 이럴 때 다시는 안 볼 작정으로 과감하게 소리치고 반항하고 욕을 퍼부을 여성이 얼마나 될까. 잘못 반항했다가는 더 큰 폭력이 행사될까 무서워 꼼짝 못하는 여성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그 끔찍한 가해자가 무죄란다. 그렇다면 여성은 화간(和姦)을 한 꼴이 된다. 게다가 거짓말쟁이까지 된다. 심지어 꽃뱀으로 몰리기도 한다. 바라는 것이 있어서 꼬리를 쳤다고도 한다. 왜 술을 마시고 따라갔느냐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남자들이 그 정도로 나오면 그냥 꼼짝없이 당하고 있으라는 것이겠지. 그리고 찍 소리하지 말고 고소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겠지.
도대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 충동을 느끼는 피해 여성들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감히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을까.
왜 법집행에서 이런 피눈물나는, 해괴한 사태가 발생할까. 바로 ‘대법원판례’라는 것 때문이다. 대법원이 한 사건에 대해 판례를 남기면 그 이후에는 줄줄이 사탕처럼 붕어빵 판결들이 줄을 잇는다. 그리고 온 나라의 형법교과서들이 이를 받아서 ‘정답’처럼 가르쳐댄다. 그저 달달 외우기 잘 해서 판검사가 된 사람들이 의문 한번 가져보지 않고 똑같은 판단들을 쏟아낸다.
이래선 안 된다. 이제 대법원은 성폭력관련 판례를 하루바삐 고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검이 검사들로 하여금 종전 판례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작심하고 기소토록 해야 한다. 한국은 강간범 1등 국가다. 고통 받는 여성들에게 눈곱만큼이라도 피해자적 감수성을 함께할 수 있는 판검사들을 양성해야 한다.
강지원 변호사
2005-10-06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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