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기억상실/이목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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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5-02-19 00:00
입력 2005-02-19 00:00
지끈거리는 머리로 잠에서 깨니 아내의 얼굴이 밝지 못했다. 전날 너무 취한 채 귀가해 그러려니 생각했다. 저녁 때 아들이 이유를 알려 줬다.“어젯밤 아빠가 비틀거리다가 화장대를 건드려 엄마 화장품이 쏟아지고 깨졌잖아요.” 넘어진 아빠를 부축하면서 “내일 아침에 이거 기억할 수 있어요.” 하고 물었더니 “그럼, 말이라고 하냐.”라고 큰소리를 탕탕 치더라는 것이다.

몇 년 전의 섬뜩한 기억이 떠올랐다. 오전에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어제 술집에서 우연히 만나 즐겁게 대화를 나눠 반가웠다.”고 했다. 만난 기억이 전혀 없어 뜨끔했다.“우리가 얼마나 얘기를 했느냐.”고 되물었다.“1시간 이상 했을걸. 아주 생산적이었는데….” ‘유령이 따로 없구나, 기억도 안 나는 말을 그렇게 오래 했다니.’ 이후 ‘필름’이 끊기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낭패감이 들었다.



지난해 알레르기 때문에 한동안 술을 자제한 적이 있다. 술자리에서 맑은 정신으로 취해 가는 사람들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취해서 기억이 안 난다.”는 변명은 비음주자에겐 설득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아내에게 백배사죄하고, 재발방지를 다짐했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2005-02-19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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