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학벌 세탁/이용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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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5-01-15 00:00
입력 2005-01-15 00:00
학벌 타파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오래된 과제이다. 세칭 명문대를 나와야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고, 혼처를 구하는 데도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뿐이 아니다. 취업한 뒤에는 직장 안에서 선후배끼리 밀어주고 당겨줘 공생하며, 더 넓게는 사회 전반에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서로 뒤를 봐주는 게 일반화했다. 그러다 보니 부패의 고리에 코가 꿰어 줄줄이 오랏줄로 엮이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처럼 위세 부리던 학벌도 유례 없는 취업난 앞에서는 한풀 꺾이는 모양이다. 엊그제 인터넷 취업 포털사이트 두곳이 각각 공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급 학벌도,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학벌도 직장 잡기에 장애가 돼 열 명 가운데 네댓 명은 학벌 세탁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석사·박사 학위자, 해외유학파, 국제공인회계사, 경영학 석사(MBA) 등 1300여명을 조사한 결과에서 64%는 고학력, 자격증 소지가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고 답했고 그 결과 41%는 입사지원서에 이같은 사실을 기재하지 않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반면 일반 대학생 680여명을 대상으로 한 다른 조사에서는 취업시 실력보다 학벌이 중요하다는 학생이 51% 대 36%로 많이 나왔다. 따라서 취업을 위해 편입 또는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학생이 45%에 이르렀다. 제 학력을 실제보다 낮춰 기재한 41%나 편입·진학으로 학벌을 높이려는 45%나 오죽 취업이 안 되면 그럴까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어제 아침 신문에는 서해의 고도에서 근무할 등대지기 한 사람을 뽑는데 전문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28명을 비롯해 모두 45명이 지원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섬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지원한 이가 많았다지만 그만큼 그들로서는 일자리가 절박했을 것이다.

학벌 없는 사회는 아마 이상향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학벌과 직업 간의 괴리가 지금처럼 큰 것은 곤란하다. 앞선 조사에서 고학력·자격증소지자 가운데 직장을 잡은 사람들도 절반가량은 현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고학력 지향으로 불필요한 사회적 낭비를 하고 있음이 통계로 드러난 것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2005-01-15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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