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습관의 힘/이정옥 대구 카톨릭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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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10-21 07:30
입력 2004-10-21 00:00
“거금 150만원을 들여 100시간 교육을 받고 집에 오자마자 집안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남편의 잔소리에 내가 이런 것이나 하려고 태어난 사람인 줄 아느냐고 즉각 대들었지 뭐예요.” 며칠 전 우연히 만난 동료 교수가 들려준 일화다. 비폭력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상대방의 의도와 감정에 맞추는 대화를 하라는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고 난 후 첫 반응은 습관으로의 원상복귀였다는 것이다.

‘습관’의 힘에 대해서는 일찍이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간파한 바가 있다. 그는 합리적인 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원인을 찾아내려는 부단한 노력 끝에 습관의 끈질긴 힘을 발견했다. 그런가 하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주목한 학자도 있었다. 보다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은 항상 이런 습관의 힘과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덜미를 잡혀왔다.

그간 우리 사회의 민주화 주요 목표는 제도 개선이었다. 여성단체들이 1990년대에 거둔 여성관련 개혁 입법의 성과는 실로 눈부시다. 성폭력특별법, 남녀고용평등법, 영유아보호법, 가정폭력방지법 등이 숨가쁘게 제정됐다. 이러한 법은 우리 사회의 관행이나 의식, 상식에 비춰 너무 늦게 제정된 탓에 큰 반대 없이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가사와 양육을 전담하고 있는 여성을 보호하고 양성평등을 지향한다는 취지를 누가 반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여성단체의 입법 제안 내용은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성매매방지법, 호주제 폐지제안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익과 명분이 대립되는 사안인 것이다. 성매매방지법이 호주제 폐지안보다 먼저 통과된 것은, 성매매라는 관행 자체를 드러내 놓고 옹호하기에는 명분이 약했기 때문이다. 명분에서는 앞섰지만 관행의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인지 법이 시행되자마자 언론은 성매매가 더욱 음성화될 것이라며 난리다. 법을 통해 관행이 바뀔 것이라고 보는 낙관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성매매방지법 문제만이 아니다. 개혁입법안에 대해서도 찬반 양론이 팽팽히 맞서 있다.90년대에는 ‘지연된 제도적 민주화’를 현실에 맞추는 시차 극복의 차원이었기 때문에 ‘동의’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2002년 이후에는 이익집단의 대립이 첨예한 사안에 대해 공론을 통한 동의를 만들어가야 하는 실질적 민주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동의’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문화의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지지 않으면 쳇바퀴를 돌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꽃 피우려면 민주시민 교육이라는 바탕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생활세계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보를 공유하고 공론을 통해 지혜를 모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뿌리깊은 습관까지 바꾸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부차적으로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다.

민주화과정은 어린 아기를 키우는 것과 같다. 우는 아기는 끊임없이 달래고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제대로 자랄 수 없다. 그래서 아이를 잘 키우려면 부모의 인내와 정성, 지혜가 필요하다. 이 간단한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지금의 혼란을 성장을 위한 진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매매방지법 통과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문화 수준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성은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매매방지법은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위해 성매매 관행을 근절하기 위한 단계로 나가기 위한 장정의 첫걸음을 뗀 것으로 볼 수 있다.

90년대 초반에 만난 폴란드의 한 여성학자는 낙태반대 법안을 일부러 통과시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자율적 결정권 인식이 먼저 생기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먼저 법으로 규제하고 나중에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든, 의식을 바꾸고 나서 법제화하든, 보다 중요한 것은 습관의 끈질긴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습관의 힘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 모두 변화에 대해 보다 겸손하고 인내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정옥 대구 카톨릭대 사회학 교수
2004-10-21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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