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고건의 구두/심재억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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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06-28 00:00
입력 2004-06-28 00:00
고건(高建) 전 총리가 서울시장에 재직 중일 때의 일이다.우연찮게 점심을 같이 하게 됐는데,어딜 다녀왔는지 신발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살펴 보니 폼나게 닦을 일이 없는,그저 편한 맛으로 신는 캐주얼 구두였다.지나가는 말투로 “시장님,구두 닦으셔야겠는데요?”라고 했더니 잠깐 뜸을 들인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나중에 시장 그만 두고 실컷 닦지,뭐.”

그 뒤 2년이 가깝도록 그의 구두를 지켜봤다.내심으론 ‘언젠가는 빤질빤질 광나는 구두 한번쯤 신지 않을까?’하는 호사가적 기대도 없지 않았으나 웬걸,볼 때마다 뒷굽이 적당히 닳아 뭉개진 그 구두였다.그걸 두고 귀 간지럽게 청백리를 운위하고 싶지는 않지만,뒤집어서 그는 ‘공직에 있는 동안은 구두 닦을 일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의 다짐을 어기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고 전 총리가 항용 말하곤 하던 그의 부친께서 유명을 달리했다.고인이 아들에게 남겼다는 ‘남의 돈을 받지 말라.’는 유훈이 마침 그의 낡고 허름한 구두와 겹쳐 떠오른다.돌이켜 보면 공직자로서는 가히 사표(師表)라 이를 만한 그다.그가 또한 지금 야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seoul.co.kr˝
2004-06-2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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