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박람궁리] 미래의 화폐, 화폐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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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26-10-22 00:46
입력 2026-10-22 00:46

외국에 조폐 맡기는 북유럽
한국조폐공사의 화폐 비중 19%
헌 돈의 새 돈 교체 주기 단축 등
경제안보 차원 조폐 활동 필요

미국인들은 달러화를 ‘벅’(buck·사슴 가죽)이라고 부른다. 식민지 시절 물건을 사슴 가죽과 교환하던 전통에서 나온 말이다. 그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제정할 때도 달러화는 없었다. 영국과 스페인의 주화가 돈으로 쓰이다가 1792년에 이르러서야 달러화 동전이 등장했다. 70년 뒤 남북전쟁과 더불어 링컨 대통령이 지폐도 발행했다. 법정화폐라는 말이 그때 생겼다.

한국의 시작은 더 초라했다. 1948년 정부 수립은 물론이고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될 때도 일제강점기 때 발행된 조선은행권이 돈으로 쓰였다. 1950년 8월 최초의 한국은행권이 발행되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돈은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서 찍었다. 1951년 한국조폐공사를 설립했지만 기술이 부족했다. 1953년 화폐개혁을 단행할 때는 미국에서, 1962년 화폐개혁 때는 영국 민간회사에서 도움을 받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6만 달러를 넘는 북유럽이 요즘 그러하다. 조폐기관을 유지하기에는 인구가 적은 덴마크는 중앙은행이 건물 지하에서 지폐와 주화까지 직접 만들었다. 하지만 현금 사용이 줄어들자 2016년 조폐 기능을 중단하고 이웃 핀란드의 조폐국에 화폐 제작을 맡겼다. 그런데 핀란드 조폐국마저 지난해 문을 닫았다. 지금 덴마크와 핀란드는 화폐 제작을 위해 이웃 나라들을 기웃거린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도 마찬가지다.

화폐 주권을 지키기 위해 유로화 편입까지 거부한 나라들이 정작 화폐 제작을 외국에 의존하는 것은 코미디다. 경제 안보 차원에서 보면 심각한 사상누각이다. 미국의 인공지능(AI) 산업이 세계 최고지만,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가 없으면 쓰러질 지경인 것과 다를 게 없다.

한국이 웃을 처지가 아니다. 지금 한국조폐공사의 영업에서 화폐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전자여권이나 상품권, 전자 신분증 등 다른 사업이 차지한다. 현금 사용 감소에 따라 본업과 부업이 뒤바뀐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한국은행은 별생각이 없다. 30년 이상 화폐발행액이 계속 줄어들 때는 아무 대책이 없다가 조폐기관이 문을 닫은 뒤 위기를 깨달은 스웨덴의 전철을 밟고 있다.

한국은행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다. 국내 은행들과는 ‘프로젝트 한강’을, 외국 중앙은행들과는 ‘아고라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의 사용 가능성을 실험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화폐의 미래보다는 미래의 화폐에 신경을 쓴다.

한국은행처럼 다른 중앙은행들도 지급결제 분야의 혁신에 관심을 갖는다. 1918년 가동된 미 연준의 전용통신망(Fed-wire)이 좋은 예다. 그때까지 연준은 송금할 때 민간 상업 통신망을 이용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채 발행과 유럽으로의 송금이 폭증하자 보안과 신속성을 위해 직접 통신망을 구축했다. 일주일씩 걸리던 국내 송금이 하루로 단축되었다.

1973년 설립된 국제금융통신망(SWIFT)도 비슷하다. 국제금융 거래의 폭증 속에 송금 오류와 지연이 빈번해지자 유엔이 인류적 재앙을 경고했다. 그러자 중앙은행들이 즉각 대응에 나섰다. SWIFT를 설립기로 하고 4년간 기술 실험을 거쳐 시스템을 가동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은행이 미래의 화폐에 관심을 두는 것을 나무랄 순 없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급하다. 전 세계적으로 지급 혁신의 격랑이 몰아친다. 그래서 심모원려(深謀遠慮)할 틈이 없다. 연구나 실험이 아닌 결단과 행동이 필요하다.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은 “통화정책은 98%가 말이고 2%가 행동이다”라는 말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의 회고록 제목은 ‘행동하는 용기’다.

경제 안보 차원에서 한국조폐공사의 외도를 방치해선 곤란하다. 현금 사용이 줄어든다면, 헌 돈을 새 돈으로 바꾸는 주기를 단축해서라도 조폐 활동을 유지해야 한다. 유통화폐의 청결도를 통해 국가 이미지가 개선된다면, 조폐 비용쯤은 감수할 수 있다.

일본은행이 그렇게 한다. 일본은 현금 이용도가 세계 최고인데도 헌 돈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이 외국 돈을 만드는 것도 시도할 만하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가 그런 일쯤 못 할까!

차현진 호서대 디지털금융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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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호서대 디지털금융경영학과 교수
차현진 호서대 디지털금융경영학과 교수
2026-10-22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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