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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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정 기자
수정 2026-05-11 00:52
입력 2026-05-1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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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의 텃밭에서 봄 모종들이 힘껏 땅내를 맡고 있다. 돈 주고도 못 살 흐뭇한 기운이 좋아서 텃밭을 끼고 걷는다.

저녁바람처럼 살랑살랑 손목을 놀렸겠지. 누가 저리도 다정히 물조리개질을 했을까. 한번 봐야지, 며칠을 별러도 허탕. 우렁각시가 다녀가는 모양이다.

오종종 심겨진 풋것들에 웃음이 났다. 고추 사이에 부추, 그 옆에 상추. 고추 모종을 심고, 그 사이에 부추씨를 뿌리고, 봄비에 또 상추씨를 묻었을 테지. 본 적 없어도 물어본 적 없어도 알 수 있는 마음, 영락없는 봄의 마음.

저쪽 빈 이랑에서 오늘은 들깨 순이 푸른 목을 내밀었다. 손뼘으로 쟀을까. 몇 뼘씩 떨어져 다문다문. 들깨 대궁들이 장차게 품을 벌릴 칠팔월을 계산해 심었다. 비바람 불거든 서로 기대라고, 저녁 미풍에는 혼자 너울너울 춤을 추라고. 붙잡지도 말고 놓지도 말라고.



사랑의 거리는 몇 미터여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 그런 날 저녁이면 나는 여기 앉아 있어야지. 따로 또 같이 서 있는 들깨 대궁들 사이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햇볕이 지나가겠지. 바람이 나드는 길, 볕이 나드는 그 길을 저물도록 보고 앉았어야지.

황수정 논설실장
2026-05-1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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