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위대한 침묵’ 20년의 기다림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 기사 소리로 듣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공유하기
  • 댓글
    0
수정 2009-12-04 12:00
입력 2009-12-04 12:00
필립 그로닝이 알프스의 1300m 고지에 위치한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을 카메라에 담기로 마음먹은 건 1980년대 중반이었다. 그는 침묵을 다룬 구름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자기 영화에 그 수도원보다 적격인 곳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1688년 설립된 이래 몇 세기 동안 외부인의 접근을 제한해 왔던 수도원이 그의 요청을 쉽게 허락할 리 만무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99년, 그로닝은 수도원으로부터 기적 같은 연락을 받는다. 수도원이 제시한 여러 까다로운 조건에 맞춰, 그는 직접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2년에 걸친 촬영에 돌입했고, 다시 몇 년이 흘렀다. 20년의 기다림이 녹아 있는 ‘위대한 침묵’의 간략한 연대기는 이러하다.

 ‘위대한 침묵’은 분명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지만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레 발길을 돌릴 필요는 없다. ‘위대한 침묵’은 종교를 강요하는 류의 영화가 아니며,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잘못 알려진 것처럼 ‘위대한 침묵’은 상영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진 않는다. 어떤 소리도 없는 스크린을 뚫어져라 봐야 한다면 세 시간에 가까운 상영시간을 버티기가 괴로울 테지만 ‘위대한 침묵’은 ‘침묵에 관한 영화’이지, 결코 ‘침묵의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 필자는 이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영화를 보지 못했다. 영원의 시간과 이미지를 통과하는 데 160여분은 오히려 짧게 느껴졌다.

 감독 로베르 브레송은 ‘소음들이 (영화의) 음악이 되어야 한다.’고 쓴 바 있다. ‘위대한 침묵’은 그 말을 실천한 듯 보이는 작품이다. 침묵은 언어, 기호, 잡생각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침묵을 맹세한 자들은 자연의 소리 한가운데로 침잠한다. 들리나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듣는 것. 그것은 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과 같으며, 자연의 소리는 ‘영원한 존재’의 현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고요에 빠지는 대신, 자연과 그 속에서 호흡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소리에 귀를 연다. 계절이 변화하는 소리, 수도사들이 작업하며 내는 소리, 물체의 작은 움직임이 빚어내는 소리 등은 불멸의 존재에 다가가려는 열망과 하나가 되어 관객을 숭고한 상태로 이끈다. 그 곳에 기도의 염원, 불꽃의 따스함, 눈(雪)의 가벼움, 구름의 침묵이 나란히 자리한다.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자막이 영화 내내 자주 나온다. 수도원의 생활은 청빈 자체다. 자족하는 공동체의 미덕을 따라 수도사들은 각자 맡은 노동을 기꺼이 행하는데, 최소한의 조건으로 유지되는 삶의 검소함은 ‘버림의 가치’를 깨닫도록 만든다. 그러한 삶을 영위하면서 구도의 길을 멈추지 않는 수도사들을 때때로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대한 침묵’은 아름다운 얼굴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 중, 길게 자란 눈썹으로 나이를 쉬 짐작할 수 있는 수사는 눈이 먼 사람인데 그의 피부는 소년처럼 부드럽고 그의 표정은 아기처럼 천진난만하다. 믿고 따르는 것에 평생을 헌신한 자의 얼굴은 그토록 경이로운 것이어서, 매일 거울을 보지만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지 못한 우리에게 작은 미소만으로도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영화평론가
2009-12-04 19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에디터 추천 인기 기사
많이 본 뉴스
원본 이미지입니다.
손가락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확대해 보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