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주영 칼럼] 허무주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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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6-12-07 00:00
입력 2006-12-07 00:00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다.’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었다.1970년대의 대학가에서 즐겨 불렸다. 군사독재의 암울한 시대에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젖어 이리저리 어울려 다니며 불렀던 노래다. 노랫말 대로 본업인 학업은 뒷전이었다. 허무주의가 짙게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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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영 이사대우·멀티미디어 본부장
염주영 이사대우·멀티미디어 본부장
그런 허무주의가 지금 우리 사회 도처에서 느껴진다. 맞벌이 7년째인 어느 부부는 “저축하나 마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신혼초의 약속대로 부부는 함께 직장에 나가며 출산도 미룬 채 알뜰살뜰 저축했다. 하지만 집값은 저축한 돈의 다섯배가 올라 내집 마련 꿈을 접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맞벌이 안하고 집보러 다닐 걸. 저축하지 말고 빚내서 아파트나 사둘 걸.

수년째 취업을 못하고 있는 어느 청년 실업자는 “취업하나 마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지방에서 올라와 남들이 선망하는 번듯한 대학을 나왔다. 지금까지 100여장의 이력서를 써 냈지만 모두 실패했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이곳 저곳 알바로 전전하고 있다. 법정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수입으로 매달 방세와 식대, 교통비를 제하면 간신히 똔똔이다. 취업도 제대로 못할 걸 비싼 등록금 내며 대학은 왜 다녔는지.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만 믿고 한푼 두푼 모았던 사람들은 집장만을 포기하고, 겁 없이 뭉텅이 은행빚 내 아파트 산 사람들이 떵떵거리는 요즘 열심히 저금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한 사람들은 살 맛이 안난다. 허무주의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들에게 더 열심히 살아 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이내믹 코리아의 자신감과 활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제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지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국은행은 한술 더 떴다. 우리 경제가 “성장하나 마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지난 주 ‘3·4분기 국민소득’을 집계해 보니 경제성장률(GDP증가율)은 4%를 넘었으나 국민총소득(GNI)증가율은 0%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경제가 성장했는데 소득은 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득 없는 성장은 왜 하는 것인지.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는 왜 안 늘어나는지. 서민들의 삶은 왜 갈수록 고달프기만 한지.

기업들은 “투자하나 마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심각한 투자기피증을 앓고 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과 모험의식이 사라졌다. 기업 하려는 의욕을 잃었다. 그 결과 막대한 현금을 쌓아두고 이자놀이만 하고 있다. 정상적인 경제에서는 기업은 투자의 주체이며, 가계는 저축의 주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다. 기업이 저축하고 가계는 그 돈을 빌려 부동산 투자에 올인하고 있다. 가계는 눈이 뒤집혀 절제력을 잃고 있다. 그 결과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가계의 소비여력이 고갈되고, 경제활력은 소진되어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며칠 전 통계청이 발표한 ‘2006 사회통계조사’에는 의욕상실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국민의 절반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수 없다고 믿고 있다.10명 중에 1명은 자살충동을 느낀다. 청소년의 거의 절반은 창조와 도전정신이 필요한 직종보다는 안전하게 정년을 마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대로는 미래가 어둡다. 우리들의 처진 어깨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줄 새로운 비전은 없는가.2006년 말 사회 저변에 허무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논설실장 yeomjs@seoul.co.kr
2006-12-0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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