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746)-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3)
수정 2006-12-01 00:00
입력 2006-12-01 00:00
제4장 儒林(3)
마침내 공림 앞 광장이 드러났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2월의 쌀쌀한 늦은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장 앞은 관광객으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을 상대로 한 장사꾼들의 아우성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나를 보자 장사꾼들은 용케도 나를 외국에서 온 이방인으로 알아보았고, 그러자 벌떼처럼 일어나 나를 에워쌌다.
“1000원,1000원. 싸다, 싸…”
장사꾼들은 서로 손에 물건을 들고 나를 물어뜯을 것처럼 공격하였다. 그중에서 내 눈에 띈 것은 수레를 끌고 다니는 노점상이었는데, 그들은 수레 위에 붉은 색이 나는 과일을 들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일이 아니라 무였다.
이곳 지방의 특산물로 껍질을 벗기면 그 속이 수박처럼 새빨간 홍무였다. 나는 홍무를 하나 사서 껍질을 벗겨주기를 기다려 천천히 그것을 씹었다.
무라고 하기에는 달콤하고, 과일이라고 하기에는 무미한 홍무를 나는 디즈니만화에 나오는 토끼처럼 씹어 삼켰다.
원래 사기에는 공자가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가에 매장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장면을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노나라의 북쪽 사수가에 매장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3년간 상을 입었다. 또 3년간의 심상(心喪)을 끝내고 서로 이별하려 할 때에는 소리 내어 울었다.”
따라서 공자의 무덤이 사기에 기록된 대로 도성의 북쪽인 이곳에 묻혀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되는 명확한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무덤이 도성 북쪽에 있다는 기록은 오늘날에도 입증되는 사실이나 무덤 곁에 사기에 기록된 대로 사수라는 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불분명하다.
다만 오늘날 공림 안에는 수수(洙水)라고 불리는 개울이 흐르고 있는데, 이는 강이라기보다는 작은 도랑에 불과하므로 아마도 사기에 기록된 사수는 물길이 끊겨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린 듯 보인다.
또한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매년 공자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많은 유자들이 공자의 무덤 앞에서 예를 익혔고, 향음(響音:향악의 우등생을 군주에게 추천하는 예식), 대사(大射:향인의 궁술시험) 등의 예를 행했다. 공자의 무덤은 1경(一頃)이었다. 제자들이 기거했던 당은 후세의 묘로 남아 공자의 옷과 관, 금(琴), 거(車), 서(書)를 보관했다. 한(漢) 대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200년이나 존속되었다. 한나라의 고조가 노나라에 들렀을 때에는 태뢰(太牢:소, 양, 돼지)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경상(卿相) 등이 이 땅에 오면 언제나 공자의 무덤에 먼저 참배한 뒤에야 정사를 보았다.”
이렇듯 공자의 묘는 한(漢) 대에 이미 존재하였으며, 한나라의 고조가 제사를 지냈던 그 당시 이미 사방1경(1경은 100묘)에 해당되는 거대한 묘역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2006-12-01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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