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379)-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5)
수정 2005-07-01 00:00
입력 2005-07-01 00:00
제1장 浩然之氣(5)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누어진 것은 바로 공자가 ‘춘추’라는 사기를 통해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으로, 어쨌든 공자는 춘추시대 때의 사람이고 맹자는 전국시대 때의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불과 10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와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천양지차의 시대적 배경을 보이고 있다.
우선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 때에는 140여개의 제후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처럼 강국과 약소국이 함께 혼재하고 있어 끊임없이 약육강식의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그래도 제정일치의 종교적 권위를 가진 천자 주 왕실에 대한 봉건주의적 존경심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강자와 약자의 국가적 병합은 있었지만 주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가진 제후국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전혀 양상이 달랐다.
이러한 부국강병책은 철제농기구의 사용과 소와 쟁기를 이용한 우경(牛耕)으로 급속한 농업의 발전을 일으켰고, 화폐의 사용으로 눈부신 경제의 발달도 함께 가져왔다. 급속한 사회와 경제의 변동과 함께 질서의 붕괴는 약 300년간에 걸쳐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탄생시켰으며, 새로운 가치관과 질서에 대한 활발한 논쟁을 벌여 중국사상사에 있어서 여명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제자백가.
중국춘추전국시대의 여러 학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이들 학파들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제자백가들의 자유로운 논쟁과 토론으로 학문과 사상은 더욱 발전되어 ‘많은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난다는 뜻’인 ‘백화제방(百花齊放)’의 르네상스시기가 도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좋게 말하면 문예부흥기의 르네상스이지만 실은 궤변과, 맹자의 표현대로 ‘사설(邪說)’과 ‘방자하고 음탕한 말(放淫)’들이 난무하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암흑기였던 것이다.
맹자는 바로 이러한 전국시대의 한복판에서 태어났으며, 자라날 때부터 백가의 학파들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쟁명 속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치 바울로가 빛의 갑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고 예수의 전사로 나섰던 것처럼 맹자는 이 백가쟁명의 암흑기 속에서 스스로 유가의 갑옷을 입고 성자 공자로 온몸을 무장하고 공자의 투사로 나선 것이었다.
이것이 맹자를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든 계기이며, 유가의 검객이자 검투사로 불리게 만든 시대적 배경인 것이다.
실제로 맹자의 제자 공도자(公都子)는 맹자에게 어째서 사람들과 논쟁하기를 즐겨하는지 그 이유를 묻는다. 이 질문에 맹자는 이렇게 해명한다.
“내가 어찌 논쟁하기를 좋아하겠느냐.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천하에 사람이 생겨나기는 오래되었고, 세상은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혼란해지기를 되풀이해왔기 때문이다.…”
2005-07-01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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