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181)-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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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09-15 08:12
입력 2004-09-15 00:00
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기원전 501년,노나라의 정공 9년.공자는 마침내 중도재(中都宰)란 벼슬로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정치에 뛰어들게 된다.이때 공자의 나이 5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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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젊은 시절이었던 19세 때 위리라는 벼슬에 있었고,2년 후인 21세 때는 승전리가 되었던 것이 공자가 지금까지 했던 유일한 관직생활이었다.하나는 창고의 물건을 관리하는 낮은 벼슬이었고,나머지 하나도 나라의 가축을 맡아 기르는 하찮은 벼슬이었지만 ‘공자세가’에서는 하나같이 공자가 위리를 맡자 ‘창고의 물품장부가 깨끗이 정리’되었으며,공자가 승전리를 맡자 ‘가축이 크게 번식하고 잘 자랐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30년 동안 공자는 다른 벼슬은 하지 못하였다.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년 남짓 제나라로 망명하기도 했지만 재상 안영의 교묘한 제지로 아무런 소득 없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공자는 그러나 마침내 51세가 되어서야 ‘중도재’란 벼슬로 등용된 것이다.

중도재란 문자 그대로 노나라의 수도인 곡부가 아닌 제2의 도시였던 중도를 다스리는 직책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시장이나 도지사에 해당하는 벼슬이었던 것이다.공자가 꿈꿔왔던 한 국가의 정치를 좌우할 수 있는 대부나 상경의 위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벼슬할 수 있는 계급 중 가장 낮은 신분인 사에 속했던 공자로서는 만족할 수 있는 벼슬이었던 것이다.

사기에 나와 있던 대로 공자가 주나라로 가서 노자를 만나고 온 뒤부터 제자들이 점차로 많아져 공자는 이미 사상가로서 전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자신이 15세 때 배움에 뜻을 두었고,30세 되어서는 익힌 바를 굳게 지켜 흔들림이 없었고(而立),40세 이르러서는 일처리와 도리를 이해함에 모르는 바가 없었고(不惑),50세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깨달아 하늘과 사람을 원망치 않게 되었으며(知天命),60세 때는 다른 사람의 한마디만 들어도 곧 시비의 판단은 물론 인품까지 알게 되었고(耳順),70세에 달하니 말과 행동은 물론 사고함에 전혀 과오가 없었다(從心所欲)고 고백하였는데,이렇듯 공자가 중도재에 등용된 것은 자신의 말처럼 ‘하늘의 뜻을 깨달았던 지천명’의 황금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공자는 하늘의 뜻을 깨달았던 51세 때에 중도재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간벼슬에 기꺼이 뛰어들었던가.인류가 낳은 대사상가이자 성인이었던 공자가 어째서 그토록 현실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가.노자로부터 직접 ‘예를 빙자한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하는 병과 헛된 집념’이라는 노골적인 비난을 받으면서 세속적인 욕망의 화신으로까지 비유되었던 공자.그것을 공자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공자는 자신의 제자였던 자로(子路)로부터도 못마땅한 핀잔을 받게 된다.자로는 공자보다 9세가 연하인 제자로 이름은 중유(仲由)였으며,성격이 과감하고 거칠었으나 한편 솔직하고 곧아서 스승에 대해서도 바른말을 잘 했으므로 공자는 자로에 대해 늘 걱정을 하면서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로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공자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만류하는 장면이 사기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산불뉴(公山不 )가 비(費) 땅을 근거로 계씨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사람을 보내어 공자를 초청한 일이 있었다.공자는 오랫동안 학문을 닦아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실제로 활용해 보지도 못하였고 아무도 자기를 등용해 주지도 않았다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2004-09-15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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