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107)-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수정 2004-06-03 08:25
입력 2004-06-03 00:00
제4장 文正公
무덤으로 오르는 오솔길 옆에 거대한 신도비가 우뚝 서 있었다.신도비는 지난날 종 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가에 세워진 석비였다.
이 신도비가 세워진 것은 선조 18년(1585년)으로 조광조 사후 66년이 흐른 뒤였다.
어명을 받고 비문을 지은 사람은 노수신(盧守愼)이고,비문을 쓴 사람은 이산해(李山海)였다.노수신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영의정에 이르렀던 대학자였는데,어명으로 자신이 신도비명을 짓게 된 이유를 비문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융경(隆慶) 무진년(戊辰年)은 지금 임금(선조)의 원년이다.정암 선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다음해에 시호를 도덕이 있고,견문이 넓으며,정도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킨다는 뜻으로 문정(文正)이라고 내리셨다.이윽고 어명으로 그의 행동을 기록하게 하시고,서원과 사우 세우는 것을 허락하셨다.이는 천심을 나타내고 사람의 도리를 붙잡아 혁혁하게 사람의 이목에 비춰진 것이었으니 이 때문에 한 나라의 선비된 자들이 안심하게 되었다.그뒤 11년 만에 진신포의(縉紳布衣)들이 모두 그 묘도(墓道)에 비각이 없다 하여서 모두들 나에게 와서 비명을 부탁하였다….”
서문에 나오는 ‘진신포의’ 중에서 진신은 옛날 벼슬하는 자가 홀(笏)을 꽂고 신(紳)을 드리웠기 때문에 관복을 입는 말이며,포의는 베로 지은 옷으로 미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그러므로 여기서는 벼슬한 사람,안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신도비를 세울 것을 원하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인 것이다.
신도비에 새겨진 비문은 석비의 앞뒤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조광조의 생애를 비롯하여 그의 업적과 행장을 남김없이 기록하고 있는 비명은 다음과 같은 찬사로 끝맺음하고 있다.
“정성스럽고 한결같이 큰 자리에서 옛것을 참고하여 새것을 도모하였도다.
왕도를 행하시고 백성을 안정시키니 바람처럼 움직여서 교화가 퍼져 갔도다.
진실로 총명하여 사리를 통달하면 물욕(物慾)의 가리움도 저절로 없어지니 나의 병이 아니로다.
그러나 소인들은 속으로 원을 품어 무리들이 이를 가니 꺼진 재가 다시 타도다.
얼굴 표정 바라보고 눈치를 엿보아서 어찌하면 이간하고 어찌하면 허물할까 자나 깨나 모의하네.하지만 선생은 순리대로 살아가고 죽음도 편케 여겨 나라 위한 그 단충은 밝고 맑은 한수(漢水)이고 배어나는 샘이로다.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망하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며,뒤에도 계시옵고 앞에서도 계시도다.
역대의 임금들이 은혜를 베푸시어 사방의 모든 선비 보호하고 호위하니 아직까지도 전한 것이 있도다.
공(功)은 비록 두어 해를 깊이깊이 닦았으나 은택(恩澤)은 백성에게 흘러서 내려가도다.
온전함을 더욱 밝게 볼 수 있어 잘 모르는 그들에겐 내 이렇게 고하노니,두려워하지 말며 의심도 하지 말고,어진 이와 현명한 이를 반드시 믿어 주오.
아아! 슬프도다! 성공하며 패하는 건 하느님께 맡겨두리.”
신도비.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跡)을 기리는 비석.대개 무덤의 남쪽을 향해서 세우는데,여기서 신도란 말은 죽은 사람의 묘로(墓路),곧 신령의 길이란 뜻이다.그렇다면 이 오솔길은 조광조의 신령과 만나러 가는 유일한 신도(神道)일 것인가.
2004-06-03 23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