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93)-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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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05-14 00:00
입력 2004-05-14 00:00
제4장 文正公
어느덧 넓은 도로가 나타났다.왕복 6차선의 준 고속도로였다.관리가 말하였던 대로 수원으로 가는 43번 국도였는데,43번 국도가 나타난 것은 가르쳐준 대로 정확한 방향을 따라 가고 있음을 증명해준 것이었다.
연이어 새로운 도시가 나타났다.지금까지 내가 달려온 것보다 더 새로운 신 개발지였다.
그러나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어제 내게 특별히 강조했던 관리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43번 국도를 따라 곧장 달려오시면 안 됩니다.그러면 곧장 북수원으로 직행하시게 될 것입니다.한 5분가량 달려오시다 보면 오른쪽으로 ‘수지초등학교’로 들어가는 표지판이 나올 것입니다.그 표지판이 나오면 샛길로 들어오셔야 합니다.절대로 입구를 놓치시면 안 됩니다.”
나는 메모지를 들어 다시 한번 확인하여 보았다.메모지에는 ‘수지초등학교’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나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입으로 중얼거려 외워보았다.
“수지초등학교,수지초등학교”
나는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迷路)에 빠진 느낌이었다.수 없는 반복훈련으로 출구를 발견하는 실험용 쥐처럼 내 앞에 펼쳐진 거대한 도시의 미로는 나를 실험용 미아로 만들고 있었다.
마침내 도로 한 옆에 세워진 철제기둥에서 내가 찾던 ‘수지초등학교’의 표지판을 찾을 수 있었다.하마터면 지나칠 뻔 하였으므로 황급히 핸들을 꺾어 출입구처럼 빠져 나왔다.갑자기 2차선으로 접어든 옛길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찾아가고 있는 목적지가 거의 다 와가고 있음을 느꼈다.
첫 번째 네거리에 이르자 왼쪽으로 관리가 말하였던 것처럼 대기업의 기술원 건물이 보였고,키가 낮은 야산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이 시작되었다.아직 무시무시한 난개발의 발톱이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한 듯 오월의 신록들이 야산을 새파랗게 뒤덮고 있었다.
나는 차창을 열었다.그러자 싱그러운 숲 냄새가 훈풍을 타고 스며들었다.이곳의 옛 지명은 ‘서원골’,지금은 용인시의 상현동이지만 옛사람들은 이곳에 ‘심곡서원’이 있다 하여서 ‘서원골’이라고 불렀을 것이다.기록에 의하면 심곡서원은 광교산(光敎山)의 끝자락과 이진산(離陣山)을 잇는 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하였는데,그렇다면 저 신록으로 뒤덮인 산의 이름이 광교산일 것인가.
어쨌든 서원에서 전해 내려오는 연보에 의하면 이곳에서 조광조는 젊은 시절 10년 가까이 머물렀던 것처럼 보인다.연산군 6년(1500년) 조광조 나이 19세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묘막을 짓고 시묘하였으며,끝난 후에는 선영묘 근처에 초당을 짓고 그곳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때의 기록을 연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생은 이미 상을 벗었으나 애통함을 다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묘 밑에다가 초당 몇 칸을 짓고 영원이 사모하는 곳으로 하고 또한 못을 파고 축대를 만들어 연꽃과 잣(은행,느티)나무 두 종류를 심어놓고 쉬는 것을 의뢰하였다.어머니를 봉양함에는 맛있는 음식을 드리고,겨울에는 따스하게 하고,여름에는 서늘하게 해드림을 삼갔다.힘써 글 읽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여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사서(四書)로서 위주로 삼고,그 다음의 모든 경서와 성리학에 대한 글들과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읽었다.매일 닭이 울면 세수하고,머리 빗고,엄숙히 단정히 앉아 심기를 편안히 하고,구부리고 읽으면 우러러 생각하며 생각하여 터득하지 못하면 비록 날이 다하고 밤을 새우더라도 터득할 것을 기약하고 스스로 한정적인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참을성을 쌓고,힘쓰기를 오래하며,덕의 그릇이 성취되었으나 오히려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으로 힘씀을 삼았다.이때 사화(戊午士禍)가 성하여 사람들은 선생이 하는 짓을 보고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라 칭하고,어떤 사람은 재앙의 근원이라 칭하여 친구들이 간간이 끊어지기도 했으나 선생님은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2004-05-14 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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