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72)-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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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4-04-15 07:51
입력 2004-04-15 00:00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가 스승 한훤당의 수하에서 학문을 배운 것은 1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한훤당이 희천으로 유배된 지 2년만에 순천으로 이배되었기 때문이었다.스승과 헤어질 무렵 조광조는 한훤당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생님,공자께오서는 왕도(王道)를 실행하고자 하여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70명의 임금을 유세하였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하오면 공자께서 실행하고자 하였던 왕도정치는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조광조의 질문은 회남자(淮南子) 태족훈(泰族訓)에 나오는 구절이었다.왕도정치를 펼치기 위해 70여개국을 주유하였으나 실패로 끝난 공자의 행각을 사기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왕도를 밝히려고 70여 나라의 임금을 유세하였다.”
나이 55세에 왕도정치를 실행하기 위해 노나라의 사구(司寇)라는 벼슬을 내던지고 국외로 여행길에 오른 공자는 그러나 68세에 노나라로 되돌아가기까지 13년 동안 70여 나라를 주유하였으나 실패를 하게 된다.그러므로 조광조의 질문은 공자가 펼치려던 왕도정치의 핵심은 무엇이며,그것이 왜 70여 나라로부터 배척당하였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제자의 질문을 받은 한훤당은 심사숙고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다만 옛말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한훤당은 대답 대신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이 써 내렸다.한훤당이 쓴 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至治馨香 感于神明”
그 말의 뜻은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향기는 하늘의 신명까지도 감명시킬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는 주서(周書) 군진편(軍陣篇)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 그것이 바로 스승 한훤당이 조광조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준 유훈이 되었다.조광조는 스승이 써준 그 문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부친의 묘소 앞에 초당과 연못을 만들어 놓고 학문에 정진할 무렵에는 이 문장이 조광조의 화두가 되었다.마침내 유배지 순천에서 스승이 사사되었다는 부음을 들었을 무렵에는 한훤당의 유훈을 통해 독특한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주공(周公) 단(旦)은 주나라 건국의 공신이요,특히 주나라 문물제도의 창제자였다.공자는 언제나 이 주공을 꿈꾸며,주공이 제정한 문물제도를 어지러운 자신의 춘추시대에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주공에게 걸고 있었던 것이다.공자가 주공을 얼마나 존경하고 있었던가를 술이(述而)편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심히 내가 노쇠하였구나.오랫동안 나는 주공을 다시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으니(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 夢見周公).”
조광조는 공자가 펼치려던 왕도정치가 바로 주공이 말하였던 ‘지치(至治)’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지극히 훌륭한 정치의 효과는 향기와 같아 하늘도 감명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무엇보다 다스리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완성되어 향기를 뿜어내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지치주의(至治主義).
조광조에 의해서 전개된 독특한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이렇게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문과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한 조광조의 답안 서두에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임금과 백성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예전에 이상적인 임금들은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성인들은 하늘과 땅의 근본과 수많은 백성들의 무리를 하나로 여겼기 때문에 그런 이치에 따라 도를 행하였습니다…”
2004-04-15 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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