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생태 정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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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3-05-31 00:00
입력 2003-05-31 00:00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야망이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던 두세 해 전,우연한 일로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을 때,나는 그에게 80년대 어떤 모임에서 강연을 들은 일이 있노라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했다.그러자 그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아,또 무슨 말로 제가 실수를 했던가 싶습니다!”자신의 말이 자주 뜻하지 않은 논란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에 겁을 먹고 있음이 분명했다.초면의 자리에서 인사 삼은 말인데,반응은 과민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더욱 ‘말로써 말 많은’ 구설(口舌)에 시달리는 듯이 보인다.그가 내뱉는 말은 그로서는 일상의 생활언어,또는 평소에 자주 입에 올리는 그만의 구어(口語)인 경우가 많다.‘잡초론(雜草論)’은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나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막말 투정보다는 정제(整齊)된 표현에 속한다.잡초는 정치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수구 부패 정치인,정치판이라는 논밭에서 ‘뽑아버려야 할’ 대상을 지칭한 것이다.이 말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가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자리에 있기때문이다.

‘잡초’라는 어휘 때문인지 잡초의 대가인 ‘야생초 편지’의 저자가 이의를 제기했다.제 발 저린 수구 정치인이나 수구 과점 언론들이 말꼬리 잡고 펄쩍 뛰며 반발하는 것은 예상을 벗어난 것이 아니지만,옥중서간집 ‘야생초 편지’로 유명한 황대권 생태운동가가 글을 써서 이의를 제기한 것은 뜻밖이다.그는 80년대 조작된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30세에서 43세까지,전두환 정권 때 갇혔다가 김대중 정권 때에야 세상에 나온,우리시대의 대표적인 ‘색깔’ 희생자 중 한 사람이다.

그가 보기에 ‘잡초론’의 함정은 그것이 “선혈 낭자했던 ‘빨갱이 사냥시대’를 연상시킨다.”는 데 있다.편 가르기나 흑백논리의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제초(除草) 논란은 우리사회의 오랜 악습인 ‘색깔 덧씌우기’ 속성과 닮았다.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잡초 사냥꾼’이 횡행하는 세상이 와서야 되겠느냐는 것이 그의 진정한 우려다.잡초라는 것은 식량생산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산업농 시대에 제초제를 써서 일거에 제거하는 ‘작물 외의 모든 풀’을 말한다.독극물인 제초제는 우리 논밭에서 생물다양성을 급격히 감소시키고 심각한 환경 재앙을 부른다.제초제 농사에는 작물이냐 아니냐에 따라 어느 한쪽을 절멸시키는 극단적인 이분법의 세계만 존재할 뿐 다양성과 같은 균형과 조화는 없다.

잡초만 아니라 독초라도 그 나름의 생태적 역할이 있는 것이다.균형을 깰 정도로 번성하지 못하도록 ‘관리’하면 되는 것이지 싹쓸이 ‘제거’만이 능사가 아니다.그것이 생태 농업의 기본 철학이다.지금 ‘잡초’라는 수사(修辭)로 노무현 정부가 추구하는 과거 청산은 이런 생태 농업의 철학에서 너무 멀다.생태농업은 제초제를 쓰는 농법보다 훨씬 더 힘이 든다.그러나 일단 자리가 잡혀 생태적 균형이 회복되고 나면 그때부터 농사는 훨씬 쉬워진다.



통치 원리도 같다.제초제라는 ‘독’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억누르고 국가 사회 전체의 건강을 긴 눈으로 내다보는 일,국민이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여 건강한 나라를 만들어 나가도록 정책적으로 배려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정치가 가야 할 바른 모습이다.새만금 갯벌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건 수도자들의 3보1배 대장정(大長程)이 마침내 서울에 들어왔다.그들의 피와 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언어를 절하는 고난이고 희생이다.그리고 그것은 “지금 새만금 갯벌 위를 기어가는 한 쌍의 고둥을 위해 수도자들인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명사랑의 절정이다.새만금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 앞에 가로놓인 무수한 ‘선택’의 문제 중 하나가 아니다.특정한 몇 사람이나 특정한 지역,그것들을 포괄하는 우리 국민이나 우리 국토에만 머무르는 일도 아니다.생명의 문제이고,지구 유기체의 문제이며,이미 거대한 철학의 명제다.새만금 생명이 내지르는 비명 앞에서 대통령의 결단은 무엇인가.

정 달 영 칼럼니스트
2003-05-31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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