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문위원 칼럼] 오보파동과 언론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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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3-05-27 00:00
입력 2003-05-27 00:00
김일성이 정말 죽기까지 ‘김일성 사망설’을 수도 없이 들었기에 북한과 관련된 오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무감각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또한 북한 관련 취재가 일반적인 취재와는 크게 다른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이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그동안 남북관계가 표면상으로는 진전된 것처럼 보였고 그에 따라 우리 정부나 언론의 북한에 대한 정보력도 향상되었으리라는 당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소동의 근원지인 연합뉴스는 “신뢰할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망명설을 처음 접하고 나서 관련 정부부처에 다각도로 확인했으나 망명설을 부정할 만한 사실들이 확인되지 않아 그대로 보도했다고 변명했다.조금만 더 기다리며 사실 확인작업을 했어도 이런 망신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안타깝기 짝이 없다.확인이 안 된 정보를 뉴스로 밀어붙인 것은 특종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연합뉴스의 스트레이트 기사는 그렇다 치더라도,다른 방송사와 신문사들은 왜 사실 확인 작업은 제쳐놓고 연합의 엉터리 밑그림에 색깔까지 입혀가며 시청자와 독자들을 우롱하였는지 변명의 여지가 없다.19일자 대한매일에도 그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2면에는 망명 설에 대한 이의 제기 등 정보 혼선이 있음을 보도하면서,3면에서는 ‘북체제 이상징후’라는 제목 하에 “잇단 최고위층의 망명 설로 북한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신중하지 못한 분석기사로 독자들의 현실인식에 혼란을 주었다.공신력 있는 언론기관이라면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정보에 대해서는 진실이 규명될 때까지 이런 가정적이고,추론적인 분석기사는 내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언론사들이 줄줄이 오보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하는 것으로 이번 파동은 마무리된 것처럼 보인다.그러나이런 추론 보도가 사람들의 현실 인식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단 몇 줄의 사과문으로 무마될 수 있단 말인가.또 죽은 사람의 망명이라는 터무니없는 오보와 체제붕괴 조짐이라는 심각한 내용의 추론적 기사들이 남한의 자유언론에 대한 북한 지도층의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이런 기사들은 자유언론에 대한 불신이 근본적으로 강한 그들이 그런 신념을 강화하고 이념을 재무장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뿐이다.
취재와 보도는 말 그대로 데드라인을 그어놓고 행해지는 시간과 진실의 게임이다.어느 한 쪽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승부욕에 집착하다 보면 진실보다는 시간에 쫓겨 오보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우리나라 언론의 취재 관행이나 편집국 운영 시스템을 보면 오보의 함정은 언론 스스로가 파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언론사 대부분의 통일·북한 관련 취재와 보도 시스템은 여전히 허술하기 짝이 없다.그런 수준이기 때문에 이런 오보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번 오보 파동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남북관계의 발전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우리 언론에 대해 불안과 우려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 선 열 이화여대 사회과학대학장
2003-05-27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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