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굄돌] 기억예찬
기자
수정 2003-02-22 00:00
입력 2003-02-22 00:00
배도 엄청 나오고 머리숱도 많이 없어진 채,옆에는 아빠 손을 꼭 잡고 서있는 아이까지 달고 있는 30대 중반의 남자에게서 고등학교 시절 여드름 가득했던 내 친구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건 순전히 ‘기억’의 힘이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다 바래져서 사라져 버려도 몸 어딘가에 여전히 들러붙어 남아있는 것이 ‘기억’이다.좋은 기억은 추억이 되고,나쁜 기억은 상처가 되지만 상처마저도 삶의 거름이 된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면 굳이 추억만을 떠올리며 살아갈 이유는 없다.사실 그렇게 간단히 취사선택할 수 없는 것이 기억이기도 하다.
이미 죽었고,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 김광석의 노래만 좋아하는 사람들을 사실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하지만 마음으로,논리로는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막상 그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곤 한다.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량차오웨이(양조위)의 눈매,이마의 주름이 제법 어울리는 류더화(유덕화),우아하게 나이를 먹는 장만위(장만옥)처럼 멋지게 늙어 가는 홍콩배우들을 보는 것 또한 내겐 즐겁다.
그녀의 얼굴만 봐도 가슴을 두근거렸던 학창시절의 기억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이제 중년이 되어 목에 주름살이 선명한 다이안 레인의 영화를 보러갈 용기를 내지 못할 것도 없다.이제는 나도 어느새 그녀처럼 기억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제껏 내가 지녀온 기억만큼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 속에서 기억은 계속 쌓여갈 테고,아마 난 앞으로도 그 ‘미래의 기억’이 지닌 힘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생각해보니 기억만큼 힘이 센 놈을 찾기도 힘들다.그래서인가,어느 젊은 가수는 애절한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한다.“사랑은 기억보다 먼가요.우리 추억도 기억보다 먼가요.”
조 희 봉
북 칼럼니스트
2003-02-22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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