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을 찾아] 서민애환 담긴 ‘니나놋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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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1-10-27 00:00
입력 2001-10-27 00:00
어려웠던 시절,해가 떨어지고 땅거미가 짙어질 무렵이면생활과 일에 찌든 술꾼들이 피곤과 시름을 달래기 위해 삼삼오오 어울려 찾아들던 이른바 ‘니나놋집’이 번성했던때가 있었다.

술꾼들은 젓가락 장단에 맞춰 신바람나게 노래를 불러가며한잔 술로 고단한 삶을 견뎌냈다.이들은 때로 노랫가락속에 모든 걸 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작부집’이란 부정적 이미지에 흥청거림과 방탕도 없지 않았지만 과거의 술꾼들에게는 낭만과 풍류어린 기억의단편들이 짙게 남아 있는 곳이 니나놋집이다.때문에 니나놋집은 우리 음주문화의 한가운데에 오랫동안 자리를 잡아왔다.

물론 아낙들에게는 남편의 호주머니를 후려내는 ‘몹쓸 곳’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겠지만.

니나놋집은 일반적으로 방에 상을 차려놓고 접대부의 시중을 받아가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술집으로 인식돼 있다.

‘니나노’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술집에서 젓가락 장단을 치면서 부르는 노랫가락” 또는 “술집에서 시중드는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니나놋집’은 말그대로 이 니나노가 있는 집이다.흥겹게 노는 모습이 매미와 흡사해서인지는 몰라도 동의어는 ‘매밋집’으로 표기돼 있다.

경희대 국문학과 서정범(徐廷範·75) 명예교수는 “니나노는 경기민요나 태평가 등의 후렴구에 나오는 말이지만술집과 연관된 말로 쓰인 것은 일제시대 이후인 것같다”고 말했다.이같은 어원을 반영하듯 니나놋집은 서민적 이미지가 강해 부유층들이 드나들던 요정(방석집)과는 확연히 대비됐다.

80년대 초까지 주로 중소도시의 역전 근처나 시장통,중심가 뒷골목 등에 자리잡았던 니나놋집은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짙은 분냄새를 풍기며 남자들을 끌어들였다.맥주도귀할 때라 막걸리와 소주를 주전자에 담아 부침개·편육·나물 등을 안주로 제공했지만 서민들에게는 넘기가 그리쉽지만은 않은 문턱이었다.

그러나 없어도 인심만은 후했던 시절이라 안면이 있으면외상이 통했고,외지 사람도 시계·반지 정도만 잡히면 하룻밤을 마음껏 취할 수 있었다.도·농 구분이 뚜렷하지 않던 시절이라 봄에 외상으로 먹은 술값을 가을철 추수 뒤에쌀가마니로 갚는 것도 용납됐다.

작부에게 주는 별도의 팁은 없었고 오로지 술만 많이 팔아주면 그것으로 족했다.오히려 작부와 술꾼간에 마음이통하면 대가없이 하룻밤 정을 나누는 낭만까지 있었다.그리고 작부들 역시 궁핍한 시대의 산물일 뿐 사치와 부를위해 몸을 파는 여인들은 아니었다.

시덥잖은 촌부자가 땅문서를 들고와 호기를 부리던 곳도이곳이며,반반한 계집이라도 하나 새로 들어오면 한다 하는 한량들이 문지방이 닿도록 드나들던 곳도 이곳이다.아예 집을 나온 난봉꾼이 니나놋집 뒷방을 차고 앉는가 하면서방을 찾아온 아낙네의 앙칼진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기도 했다.

어쨌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니나놋집은 지난 80년대를 고비로 카페·룸살롱·단란주점 등 고급술집의 번창에밀려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물론 지금도 일부 소도시에는방에 상을 차려놓고 술을 파는 니나놋집 형태의 술집이 있다.

하지만 대개는 변태영업을 하는 ‘텍사스촌’ 유형이어서옛날의 낭만과 애환이 서린 감흥을 기대하며 들어섰다가는실망하기 십상이다.

김학준기자 kimhj@
2001-10-27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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