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장] 실상사의 새벽
기자
수정 2001-08-02 00:00
입력 2001-08-02 00:00
실상사의 새벽은 높은 지리산 봉우리에서부터 다가와 법당의 추녀 끝을 밝히고 나무와 꽃들이 자리한 도량에 가득 내려와 앉는다.
얼마전 실상사 대중스님들이 21일간의 단식기도 정진을 마치고 회향을 했다.21일간의 단식기도는 긴 각고의 시간이었다.그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마음 속에사무치는 발원이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해인사 청동대불 사건 속에서 폭력을 목격한 그들은 다시는 종단에서,이 땅에서 ‘폭력’이 없어야 한다는 비원 속에서 기꺼이 그들의 신명을 비폭력과 화합을 위해서 바친것이다.
생각해 보라. 뼈를 깎는 수행의 21일을.그 시간이 얼마나길었으며,얼마나 무거웠겠는가를.
그들이 단식기도를 하는 21일 동안 나는 하루도 잊지 않고그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언론 보도를 통해서 전해지는 그들의 모습 앞에서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다.나는 과연 이 땅에서,그리고 종단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나는 과연폭력의 도전 앞에서 비폭력을 외치며 그들과도 같이 신명을바칠 수 있을 것인가.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하지 않고,미움을 미움으로 갚지 않기에는 실로 많은 인욕과 용기가 필요하다.그 용기는 비폭력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폭력을 폭력으로 대하지 않음으로써 폭력의 양산을 막고,자신을 거름으로 비폭력과 화합의 새날을 열고자 하는 발원끝에 그들의 발로 참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여야만한다.
우리 종단에는 대화의 문화가 부재하다.문제를 풀어나가는방식이 대화나 타협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을 모두들 잘알고 있다.그들은 발로 참회를 시작하면서 폭력성을 우리종단의 업보라 말하고 있다.이 말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없다.빈번히 이어지는 단말적인 대응에 이제는 마침표를 찍어야만 한다.
실상사 대중스님들의 ‘발로 참회와 거듭남을위한 21일단식기도 정진’을 기점으로 종단내 폭력을 일소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잃은 절망의 종단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는 종단이 답해야 할 차례이다.자비와 연기의 정신을살려내고 비폭력의 문화를 고양하려는 그들의 살신의 수행앞에서 이제 조계종단은 커다란 울림으로 답해야만 한다.그리고 그들의 발로 참회의 의미가 어디에 있고,우리 종단의희망이 어디에 있는가를 종단은 분명히 직시하여야만 한다.
실상사 대중스님들의 발원으로 우리는 이제 비폭력에 근거한 자비와 화합의 시대가 도래할 인연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렵게 도래한 인연의 시간을 방기한다면 우리는 언제 다시이러한 인연을 맞이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오래 전부터 모두들 폭력을 마감해야 한다고 했지만 과연신명을 던져서 비폭력과 화합의 길을 연 이들이 그 누가 있었는가.아무도 신명을 던져 외치지 않았기에 그들의 소리없는 외침은 오늘 더욱더 선명한 인연으로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폭력에 대해서 거대담론을 형성해 나아가야만 한다.그리고 종단은 분명한 자세로 폭력근절을 위한 대책을 내놓아야만 한다.종단의 분명한 의지가 지금 이 시간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않은가.
실상사 대중스님들의 마음 속에는 더 이상 미움이나 증오가 없다.그들의 가슴 속에는 비폭력과 자비의 빛들이 오롯이 살아오르고 있다.어떠한 폭력도 없이 어둠을 지우고 새벽을 여는 빛들처럼 그들은 점점이 모여 폭력으로 어두운이 땅과 종단을 비추고 있다.
빛들이 모여 새벽이 오듯이,그들 가슴 속에 자리한 자비의빛이 온 종도와 우리 모두에게 가득찰 때 비폭력과 상생의새벽은 오리라.
성전 옥천암 주지
2001-08-02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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