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시론] 구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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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0-11-27 00:00
입력 2000-11-27 00:00
정치인이란 직업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가 통하는 별종 직업인가?과거는 없고 현재만 있는 이들의 행실이 후세에 모범이 될까 소름끼친다.이 판국에서 가장 잘못된 것이 무엇일까? 무엇보다 공적 인물의자질부족과 문제의식 빈곤을 꼽을 수 있다.공직자로서 가장 위험한행실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정직이 어쩌구’하는 말이 유치하게들릴지 모르지만 정상적인 시민사회가 되려면 정직이 통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제 아무리 뛰고 나는 재주가 있어도 끝장이다.근대상업문명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사회철학으로 해도 정직의 윤리를 바탕에 깔았기에 가능했다.상업문명이란 약속·계약으로 맺어지는 사회관계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미국문화에서 풍요 속의 과소비와 사치는 배워들이고 독점 수법은 본뜨면서 정직이란 알맹이를 빼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 우리 지배층의 추한 모습이 바로 그 예다.우리처럼 정치고 사업이고간에 마키아벨리즘의 기법과 샤일록의 탐욕만을 밑천으로 하는 자가,명사나 유지의 탈을 쓰고 날뛰는 세상이라면 그야말로 개판인 것은 자명하다.
행적이 떳떳하지 못한 부류가 독재정권에서 연마한 아첨술,시세영합술,기회주의,밀실흥정 기술을 계속 써먹으려고 안달한다.지금 우리는바로 그런 것을 털어버리자는 것이 아닌가?어느 재벌 총수가 허풍떨며 망발한 “기업은 일류인데 정치는 삼류”라고 한 그럴듯한말에 속아선 안된다.일부 재벌과 정권의 유착구조가 개발독재의 핵심이 아니었나? 부패구조의 쌍두마차에 정치인과 일부 재벌이 각기 한쪽이지 않았나? 정권교체로 그런 모순구조를 더 유지할 수 없게 되자,부패한 기득권층의 일부나 그를 대변하는 정치인·어용 나팔수들은 개혁을 흠집내려고 ‘좌경’이라 매도했다.
또 국가가 은행을 관리·지배하는 ‘사회주의’라고 낙인찍으며,심지어는 입에 담지 못할 말로 ‘이적행위’라 떠들어댄다.현정권이 인권탄압이란 원성을 듣지 않으려고 수사와 소추를 자제하는 것을 알고,법률상 면책특권도 교묘하게 이용해 마구 물어뜯는다.이에 일부 국민은 속사정을 모른 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며,당장의 불편과 불평을그들이 대변하여 주는듯 착각하여 동조함으로써 그 기세를 돋워주고있다.
우리가 1997년 외환위기로 벼랑에 몰렸을 때 개발독재 체제의 맹점과허점을 외신은 ‘패거리=파벌 자본주의(Cronny Capitalism)’ 또는‘유교 자본주의’라고 표현했다.유감스럽게도 우리 기득권층은 이러한 비판에서 하나도 배우지못했다.3대 연고주의인 혈연·지연·학연의 패거리(파벌)문화를 탈피하려는 진실된 노력은 어디에서도 볼 수없다.오히려 개발독재 시대의 특혜와 특권 및 안정(?)을 그리워하는부패한 기득권층은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 개혁을 방해한다.헌법을 파괴한 독재자를 우상화·신격화해 찬양하며 ‘발전 주역’이라고과대포장·왜곡해 복고 반동의 공세에 총력으로 나섰다.
그들은 아직도 대중을 니체의 말처럼 ‘시장의 파리떼’정도로 보는오만함을 풍긴다.더욱 놀라운 일은 불의에 대한 대중의 열화같은 분노를 까맣게 잊었다는 사실이다.4·19의 젊은이의 분노,5·18 광주시민의 목숨건 항거,1987년 밀실 고문살인에 대해 하늘을 찌른 울분과분노….이런 과거사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봤는가? 지금 민주화를 깔아뭉개고 개발독재 시대로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것을 좌시할 순없다. 그때 얻은 기득권을 굳히려는 ‘사보타주’를 방관함으로써 자멸할 수도 없다.우리는 피눈물의 고난을 통해 얻은 기회를 멍청하게놔두어 친일파와 그 아류에게 권력을 가로채게 한 어리석은 과거를가졌다.
독재시대를 그리워하는 기득권세력은 그러한 역사를 되풀이하려고 역량을 총동원했다.우리는 더 이상 ‘못난이’가 아니라는 것을 뚜렷이보여주어, 기득권에 안주해 독재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이를 알게끔 해야 한다.
■한 상 범 동국대교수·헌법학
2000-11-27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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