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굄돌] 집들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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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00-03-01 00:00
입력 2000-03-01 00:00
집들이 많이 초췌해졌다.곧 헐릴 운명을 알고 있는 듯하다.

아직도 우리 동네에는 한옥이 많이 남아 있다.서울 시내 한복판에,그것도경복궁 전철역과 잇닿은 곳에,한옥이 밀집해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다.

적어도 오래전부터 계보 없는 주택에서 살아온 나에겐 그렇다.

재개발 업자들이 골목 구석구석까지 들어와 간판을 내건 지 얼마 되지 않아사직동과 인근 지역은 재개발 지구가 되었다. 사월이면 재개발이 시작된다는공고가 붙은 후 주민과의 조율이 끝나지 않은 채 술렁거리고 있는 동네를 나는 매일 아쉬운 마음으로 거닐고 있다.넓게 터를 잡은 한옥은 오래전에 요정이 되었거나 값비싼 한정식 집으로 변해 있다.한옥을 헐고 들어선 현대식 건물 옆,기와를 이고 있는 집들의 표정엔 눈앞에 와 있는 봄기운이 없다.이미 밤이 되어도 불을 켜지 않는 집들도 많다.

집 주인들이 서울 중심에 자리잡고 살 만큼 여유가 있었던 탓인지 대부분의집은 아직도 반듯하고,안으로 빗장이 걸린 나무 대문은 격조 있어 보인다.뒤꿈치를 들고 가훈을 찾아 읽는 재미도색다르다.이제 봄이 오면 생의 마지막인 듯 마당의 꽃들이 피어나 어디서 다시 싹틔울지도 모를 꽃씨를 서둘러 여물게 할 것이다.

골목 끝에는 몇 대에 걸쳐 살고 있는 친구 집도 있다.친구네 집 옆에는 한옥을 개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일간신문 지국도 있다.석유집도 미장원도 식당도 책 대여점도 한옥의 귀퉁이를 터서 가게를 냈다.그곳에 가면 막역하게 지내는 사람을 찾아간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재개발업자들은 이렇게 사는 우리 동네 사람들을 꽉 막혔다고 한다.적당히 먹고 살 것이 있고,낡았지만 제 집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이 동네에선 재개발 욕구가 마른섶에 닿은 불길처럼 확 번지지 않기 때문이리라. 오히려 재개발 스트레스를받은 사람은 나 같은 세입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재개발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도 생의 의미를 일상속에 축적하며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분명히!◆‘굄돌’ 필진이 바뀝니다.趙銀(40·시인) 李相淵(51·건축가) 宋美淑(42·희곡작가 연출가)裵奭鎬(43·음악칼럼니스트 ‘CD가이드’발행인)씨 등 네분이 3,4월 두달간 집필합니다.

조은 시인
2000-03-0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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