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소설 ‘수미산’…수미行者의 비장한 구도정신
기자
수정 1999-03-04 00:00
입력 1999-03-04 00:00
환속을 했다고 하지만 고씨는 마음 한 자락을 여전히 산문(山門)에 걸쳐 두고 있다.선의 정신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 작품들을 통해 그는 특유의 ‘화엄적 변증법’의 세계를 일궈왔다.‘수미산’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이 작품은 보통 소설들과는 달리 구도가 미리 짜여져 있지 않다.등장인물이 그때 그때 스토리를 이끌고가는 형식으로 꾸며졌다.따라서 주인공이 따로없다.각 등장인물들이 저마다의 업보와 발원을 안고 세상을 편력하는 식이다.구태여 주인공을 들라면 우주 한가운데 우뚝 솟은 수미산이라고 할 수 있다.수미산은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실의 산이 아니다.그것은 인도의히말라야산을 본뜬 허구의 산이요상상의 산이다.그러나 이 마음속의 산인수미산은 작가에게는 눈에 보이는 히말라야보다 더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소설에서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밑으로는 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의 세계가 펼쳐지며 그 위로 층층이 솟아 있는 하늘에는 신들의 세계가 무진장으로전개된다.
소설의 공간적 출발점은 서해안의 무인도인 무욕도(無慾島).서산 간월암(看月庵)에서 모티프를 따온 이 ‘바다의 도량’은 이름 그대로 세속의 번뇌와욕망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수행인의 발원이 담긴 섬이다.이 무욕도의 수행자들은 일정한 경지에 든 뒤에는 자비행에 나선다.소설은 지장보살처럼 지옥마저 구도의 장으로 삼고 신음하는 중생을 구하려는 수미행자의 비장한 삶에서 절정을 이룬다.
불교에서는 본래 윤회를 부정적인 눈으로 본다.윤회의 사슬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 해탈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작가는 윤회를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윤회를 무한한 수행과정으로 인식하는 그의 시각은 그래서 독특하다.그는 “누가 해탈을 윤회의 반대라고 하는가.윤회야말로 우주의 힘이고 세계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법칙이다”라고 사자후를 토한다.윤회가 해탈이라는 이 언어도단의 이치.그것은 작가로 하여금 미물조차도 자신의 삶 속으로 기꺼이 받아들에게 한다.그는 이제 이 세상에 작은 짐승이나 심지어 아메바로 태어나도 좋다.고은 시집 ‘속삭임’에 나오는 시 ‘내생’을 보면 그의 윤회·해탈관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겠다/결코!//이 다음에 나는 짐승이면 된다/큰짐승이 아니라/잔 진승이면 된다/또는/눈으로 잘 보이지 않는/아메바이면 된다…” 이렇듯 그는 끝없이 태어나고 죽는 윤회의 과정을 무한한 수행의 과정이요,깨달음이 동터오는 삶의 장으로 껴안는다.생사를 들고 나는데 작가 고은은그토록 자유롭다.억겁의 세월이 지나 그 세월마저 무너져내릴 때까지….
1999-03-04 15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