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언내언] 丹齋 63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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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9-02-22 00:00
입력 1999-02-22 00:00
베이징(北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단재는 생계비를 위해 ‘중화보’(中華報)에 쓰던 논설을 신문사에서 조사에 불과한‘의(矣)’자 한자를 고쳤다고해서 연재를 거부하여 사장이 찾아와 사과했지만 끝내 뜻을 바꾸지 않았다.
글쓰기에 이처럼 철저했던 분이기에‘조선상고사’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등 민족사학의 금자탑과 같은 저술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단재는 1908년‘대한매일’의 전신‘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재직하면서‘일본의 3대 충노(忠奴)’란 논설에서 宋秉畯 趙重應 申箕善 등 당대의 세도가 3인을 일본의 충노라고 정면에서 비판했다.그가 아니면 쓰기 어려운 글이었다. 추도식장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李圭昌옹은 단재의 베이징 망명생활을회상하면서 목이 메었다.삼순구식(三旬九食)의 기한에도 굽히지 않고 독립을 위해 애쓰던 단재를 기억하는 노(老)애국지사의 오열에서 선생의 기개를 거듭 살피게 된다.
단재는 베이징 망명 시절‘텬고(天鼓)’란 한문잡지를 발간했다.어렵사리 1·2권을 입수하여 틈틈이 번역하면서 그의 역사관과 애국정신 앞에 가슴 설렌다.6권까지 발행된 이 잡지는 현재 중국 베이징대학도서관에 보관돼 있다.식민사관으로 오염된 우리 역사가 최근 단재사학이 중심이 되는 민족사관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다행한 일이다. 추도식장에서 누군가 일제시대 3인의 ‘고집쟁이’로 단재와 한용운,心山金昌淑선생을 들면서 그들이 있었기에 식민지시대 백성이 그나마 위안을 얻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김삼웅 주필
1999-02-22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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