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책 ‘가위손’ 수난/찢기고 잘린 지식인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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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1998-07-22 00:00
입력 1998-07-22 00:00
◎전공서적·외국원서 훼손·절취 더 심각/한해 복원비 1,000만원… 1만권 폐기도/외국서는 대출 기피 국제적 망신까지

한양대 2학년 金珉嬋양(20·언론정보학과)은 최근 학교 도서관에서 사진기법 전공 서적을 들춰보다 깜짝 놀랐다.사진 모두가 예리한 칼로 오려져 있었기 때문이다.도서관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종종 있는 일”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金양은 “망가진 책을 발견할 때마다 동료 대학생들의 양식을 의심하게 된다”고 말했다.

대학도서관을 비롯한 공공 도서관의 책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밑줄을 치거나 낙서하는 것은 보통이고,침을 묻히는 등 함부로 다뤄 너덜너덜해지기 일쑤다.필요한 내용을 찢거나 오려 가는 등 ‘도덕 불감증’의 흔적도 쉽게 눈에 띈다.자기 책처럼 문제집에 답을 써가며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다.

21일 연세대 도서관 2층 인문과학 열람실.음악 미술 컴퓨터 관련 서적과 소설 등 65권이 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내용의 일부 또는 전체가 찢겨 쓸모 없게 된 책들이다.‘유화로 풍경 그리기’라는 미술 서적은표지만 남은 채 200여점의 컬러 사진이 담긴 64쪽 모두가 절취됐다.‘색채의 영향’ 이라는 미술책도 183쪽부터 191쪽까지 잘려나갔다.전공 서적인 ‘세계사’도 1∼16쪽이 찢겼다.

서강대 도서관에 비치된 ‘신문과 방송’이라는 잡지에서는 61쪽부터 95쪽까지 15대 대선과 관련된 논문이 잘려나갔다.관계자는 “복사기가 있는데도 1∼2쪽을 복사하는 게 귀찮아 잘라갈 만큼 도덕성 상실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서강대는 지난해 심하게 훼손된 서적 1만여권을 폐기했다.

서울대 도서관에도 500여권이 폐기될 운명에 놓였다.이들 가운데는 ‘해부학’,‘광고 뉴스’등 귀중한 외국원서와 ‘거시경제론’‘표준유체역학’ 등 전공서적,‘까뮈’‘논어’ 등 문학서적 등이 포함돼 있다.‘해부학’과 ‘광고뉴스’등은 사진과 도표가 면도칼로 오려졌거나 찢어져 나갔다. 꼼꼼하게 제본돼 복사가 힘든 외국서적이나 전공서적을 무리하게 복사하다 못쓰게 만드는 일도 잦다.서울대는 이런 책들을 복원하는 데만 매년 1,000여만원을 쓰고 있다.

최근에는 외국 도서관에서 빌려 온 귀중한 책들이 망가져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지난해 10월 세계도서관협회연맹(IFLA)에 가입한 국내 대학들이 미국 일본 등 62개국에서 빌린 2만7,000여권 가운데 상당수가 심하게 훼손돼 추가 대출을 거부 당했다.

도서관 출입구에 책 도난 방지장비를 설치한 서울의 모 대학은 일부 학생들이 한 술 더 떠 창문 밖으로 책을 던져 훔쳐가자 모든 창문에 철망을 설치하기도 했다.<李志運 趙炫奭 기자 jj@seoul.co.kr>
1998-07-2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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